벽소명월 - 달이 떠도 보지를 못하면
- 2007년 9월 22일(토)-9월 23일(일), 추석 귀향 길에
(1) 벽소령의 야상곡(夜想曲)
추석 귀향 길에 벽소령의 달을 탐하러 산으로 든다. 백무동에서 벽소령 가는 길은 임도를 따르는 지루한 오름이다. 갑자기 떨어지는 빗방울에 배낭을 추스리는데, 마침 국립공원 트럭이 올라온다. 그래, 지루함보다 터덜거림이 나을거야. 손을 번쩍 드니 핸섬한 총각(?)이 차를 세운다. 임도는 울퉁불퉁 자갈밭의 연속이다. 터덜터덜, 엉덩이가 덜썩덜썩하는 사이 벽소령이 지척이다.
국립공원 트럭에 편승할 수 있었던 것은 일득일실(一得一失)이다. 쏟아지는 비를 피해 벽소령을 가볍게 올랐지만, 삼정산과 벽소령 사이의 호젓한 운치를 즐기는 묘미를 잃은 셈이다. 쉽게 오른 만큼 대가를 치뤄야 하리라. 오늘도 비구름이 벽소명월을 가리니 더 잃을 것이 있으랴?
명월(明月) 대신 야상곡(夜想曲)을 예비하는 벽소령
벽소령가는 마지막 300m 숲에는 짙은 안개가 드라워져 있다. 길원은 몽환적(夢幻的)이라 한다. 몽환의 숲, K-Flow에게는 오감을 초월해버린 기적의 땅이었지. 따로 술 파는 곳이 없어도 맘만 먹으면 취할 수 있고, 미처 야상(夜想)에 젖기도 전에 나뭇잎은 하늘색, 하늘은 연두색, 눈 빛은 보라색이지. 벽소령에 달이 뜨면 그 파랑새를 만날 수 있을텐데 .......
벽소령은 산꾼들로 장터를 이룬다. 비안개가 그들을 덮으니 몽환지경(夢幻之景)이다. 오늘 밤도 달은 숨을테고, 안개비 속의 야상곡(夜想曲)이나 들어보자. 그래, 달빛 야상곡이 아니라도 좋다. 쇼팽의 야상곡 제 2번은 어떨까? 애뜻한 마음이 잘 전달될 수 있을거야. 사랑방 손님의 중절모를 쓰고 거울에 비친 옥희 엄마와 쇼팽의 녹턴(Nocturne), 그 도발적 아름다움의 표출을 보고 싶다.
쇼팽도 좋지만 드뷔시(Debussy)라면 더욱 좋을거야. 인상적인 그의 관현악곡,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이면 얼마나 넉넉하겠는가? 아니, 아니, 숲속의 빗방울 소리 안단테로도 충분할 것이다. 옅지만 묵직히 스며드는 안개속에 숲속에서 들리는 청량한 자연음이 헝클어진 마음을 다독거리고도 남을거야. 어느 새 벽소령에는 어둠이 찾아든다.
이리 가도 저리 가도 농염한 안개 뿐
(2) 달이 떠도 보지를 못하면
애시당초 벽소(碧宵)에는 푸르름이 담겨있다. 푸르름에는 두 가지 색조가 있다. 달빛에 어우러진 처연한 빛에는 슬픔이 묻어 있고, 햇살에 반짝이는 녹음이 발하는 빛에는 찬란함이 담겨 있다. 달빛도 햇빛도 없이, 스치는 빗속에 시끌벅쩍한 산꾼들의 푸른 이야기가 넘쳐난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가기 위해 훈련차 왔다는 남녀. 왠지 애처러움이 느껴진다. 그저 산이 좋아 지리산에 들고 여러 차례 종주를 했다는 동년배의 커플. 장난기 넘치는 눈매에 순수함이 살아있다. 화엄사 - 대원사의 정통 지리산 종주라는 명분에 얽매여 새벽길을 나섰다는 그들, 각황전에서 코재까지 오르면서 코끝에 땀이 송송했을거다. 천왕봉, 중봉을 거쳐 대원사까지 잘 걸으소서.
시간이 지날수록 산꾼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평소 무덤덤한 길원은 산에서 붙임성을 한껏 드러낸다. 하룻밤 묵을 산장의 자리를 다행히 구했으니 우리도 한 잔 끅! 1.8리터를 쏟아 넣었다. 배낭에 넣어가나 속에 채워가나 무게는 같겠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치 앞을 볼 수 없이 짙은 안개 속에서 나는 벽소령의 달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환영(幻影)을 쫓아서 .......
환영(幻影)으로 일렁이는 벽소령의 밤
밤새 꿈을 꾼 것일까? 벽소령의 아침도 운무(雲霧)가 자욱하다. 산장 앞의 빨간 우체통이 인상적인 것도 작년과 마찬가지. 지난 밤에 몽환(夢幻)같이 보았던 그 불빛을 몽땅 담아 저 우체통에 넣어 보낼걸 그랬다. 그 처연함은 우리들 잠자리로도 숨어들었겠지. 시대의 이단자였던 빨치산 이현상, 그의 한이 서린 벽소령의 달빛을 저 빨간 우체통에 넣었으면 .......
벽소명월을 탐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 깨닫는다. 명월은 탐하는 마음 앞에 숨는 법이니까. 어젯 밤 벽소령에 달은 분명히 떴건만, 아둔한 중생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니. 꼭 해를 보아야 해가 뜬 것인가? 날이 밝으면 이미 해가 뜬 것인데 ....... 간밤의 남은 얘기는 벽소령에 남겨두고 갈께. 못그리는 솜씨지만 벽소명월, 너를 머릿속에 그리며 새벽길을 떠난다.
오붓한 쉼터에도 환영(幻影)은 찾아들고
(3) 비오는 지리의 능선에서
아침 일찍 세석, 장터목으로 이어지는 주 능선을 걷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 모자 창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고혹한 떨림을 본다. 물방울이 떨어진들 아파할 그 무엇이 있으랴? 빠른 걸음으로 오르막을 오르고 정상에서는 산하를 둘러본다. 그리고 천천히 내리막을 걷는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주위를 보살펴야하고, 오를 때보다 내려설 때를 생각하라는 산의 가르침을 따른다.
선비샘에서 약수 한 바가지로 간밤에 탓던 속을 다스린다. 능선에는 농염한 안개가 피어나 산하를 덮고 있다. 밤새 벽소령의 푸른 빛의 영혼이 남긴 꼬리다. 벽소령에 잠든 영혼들. 몇 날 밤을 꼬박 새고, 그러기를 수십년이 지났건만 그 꼬리를 자르기가 쉽지않음을 이제사 안다. 고사목 너머로 그 그림자를 본다.
칠선봉의 짙은 안개 속에 간밤의 환영(幻影)을 다시 본다. "명월(明月), 농무(濃霧) 속에 홀로 피어난 그 달은 몽환(夢幻)이었을까? 빗속에 제 모습 감추고 애처롭게 다가온 명월(明月)을 꿀꺽 삼켰다. 눈을 떠니 벽소령의 아침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영신봉이 맞아주고 세석평원이 지척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농무(濃霧)에 휩싸인 산하가 꿈틀거린다
세석에는 주럭주럭 비가 내린다. 생태계가 제법 복원되어 가는 세석은 백설이 난무하던 그 겨울에 비해 훨씬 안온하다. 오늘의 세석이 가장 정감스럽다. 산장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거침없이 촛대봉을 오른다. 서두르는 마음을 버리고 연하봉을 향해 걷는다. 그래도 앞 사람을 추월할 때면 미안한 생각이 자꾸 든다.
저녁노을이 없더라도 안개 속의 연하봉(煙霞峰)은 충분히 선경(仙景)이다. 장터목 산장이 반긴다. 산에서 사람내음이 흘러 넘치는 곳, 그 취사장에는 발디딜 틈도 없다. 고추장 필요한 분, 김치찌개 드실 분, 커피 드실 분, 된장에 절인 깻잎 드실 분 ....... 찬비는 그칠줄 모르지만 함께 나눠 먹으려는 산꾼들의 넉넉한 목소리에, 장터목은 산꾼들의 정으로 흘러 넘친다.
이제 길원이 돌아가야 할 길을 마음으로 챙겨야 한다. 천왕봉을 뒤로하고 날쌘돌이처럼 하동바위를 거쳐 백무동으로 하산하니 오후 3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원은 4시 버스를 예약하고, 이미 고향 언저리에 온 나는 여유만만이다. 길원의 상경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도토리묵, 해물파전에 막걸리 사발이 흘러 넘친다.
벽소령의 달을 보려던 소망은 작년 봄에 이어 이 번에도 빗속에서 환영(幻影)만 더듬었다. 아쉬움이야 남지만, 그래도 좋았다. 길원이 씩 웃으며 말한다. "달을 보지 못했으니, 다시 벽소령을 찾을 핑계가 생긴 셈이지요. 뭐, 좋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자네의 넉넉한 마음이 좋다.
비안개에 촉촉히 젖어있는 세석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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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정] - 2007년 9월 22일(토)-9월 23일(일), 길원과 달무리 둘이서
2007년 9월 22일(토)
0815 서울 대치동 출발
1205 지리산 나들목(88고속도로 인월 I/C)
1400 중식, 산행 준비물 보충(인월)
1425 백무동 한신계곡 주차장 도착
- 택시로 음정마을로 이동
1450 음정마을 출발
1500 국립공원 트럭 탑승
1520 벽소령 임도 끝지점
1535 벽소령 산장 도착
2007년 9월 23일(일)
0747 벽소령
선비샘
0922 칠선봉(1558m, 4.3Km <-- 벽소령, 2.1Km-->세석산장)
1001 영신봉(1651m)
1010 세석산장(20분 휴식, 3.4Km-->장터목)
촛대봉
연하봉
1137 장터목(중식 78분)
1255 장터목 출발( 5.4Km-->백무동)
1500 백무동 도착
1600 백무동 출발
1700 진주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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