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따라 길따라/* 智異十景

벽소명월 대신 지리산을 품었으니

月波 2006. 6. 12. 14:19

 

지리10경 보러가는 벽소령길, 맑은 날씨에 벽소령 산장까지 산행은  참으로 편안한 길이었다.

저녁에 몰아친 천둥번개에 벽소명월을 잃었지만 대신 지리산을 가슴에 품었으니 ......

오랫만에 뭉친 정산, 재철, 월파 세 부부의 지리산행 이야기를 정산(正山)이 대표로 적었다.

 - 월파(달무리)-

 

 

[지리산 산행기] 아, 기다리 고기다리 던 벽소명월............. 

 

글: 정산(正山)

 

(1) 벽소령(碧宵嶺)가는 길

 

서울에서 벽소명월을 탐하는 길은 어려웠다. 작년 청계산 야간 산행에서 월파가 제안한게 차일 피일 미뤄지다가 6월 10일로 날짜가 잡혀 잠자리도 불완전한 상태에서 벽소령으로 간다. 서울을 떠나는 즐거움과 지리산에 드는 기대감과 계속 내리는 비가 어울려 묘한 걱정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남쪽으로 갈수록 빗줄기가 약해지더니 이내 비가 그치고 해가 나기 시작하니 우리가 원하던 바이다. 우리는 산행 초반에 비에 젖고 싶지 않았다. 승용차로 벽소령 임도를 한참 올라 쉽게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얼마나 달빛이 희고 맑았으면 푸른 빛을 띠었을까? 유독 여기에서만 보름달이 창백한 이유가 무엇일까? 벽소령-삼각고지-명선봉은 피의 능선. 그래서 처연한 빨치산의 원혼을 지켜주는 달빛이어서 그런가? 이현상의 선굵은 삶이 오버랩된다.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운명과 갈등하는 힘있는 명분이었다. 남부군 총사령관. 너무 똑똑하여 맞이하게 된 가혹한 운명과 그 영혼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게 아닌지? 어쩌면 벽소령의 달빛은 아름다울 수가 없는 슬픈 진혼곡일거야.

 

월파몫으로 산장이 3자리가 예약되었지만 무대뽀로 텐트도 없이 배낭을 짊어지고 간다. 남자는 비박이고 아니면 술마시고 철야를 각오하고. 이렇게 좋은 초여름에 잠못자는것이 무엇이 두려우랴? 이 핑계 저 핑계로 가는 마음을 못내는 것이 늙어 버린 것 같은 두려움이지.

 

 

(2) 벽소명월대신에 벽소폭우를

 

지리 십경은 어쩌면 상상의 이미지이다. 실재하는 경치에는 오히려 실망하는 머리와 가슴으로 그려지는 그림인지 모른다. 8경이니 10경이니 하는 것은 호사가들이 이름붙인 허명. 경치는 종국에는 내가 마무리하며 만드는 것이라.

 

비와 바람은 아고산지대의 고약하지만 늘 함께하는 자연의 벗들이다. 그것들이 세차지만 우리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일 날이 더 좋아질거라는 근거 있는 확신을 하며 저 멀리 나타나는 능선의 실루엣을 위해 슬라이드 필름까지 준비한 것이다. 풍경과의 인연으로 몇 커트를 담는다. 화장실도 안개비속에서는 괜찮은 오브제가 될 수 있다.

 

지리산 주 능선의 중심부 벽소령이 약 1400고지즘인데 살을 직접 때리는 빗방울은 얼음 같다. 비에 젖은 새양쥐의 형상을 한 산행객들이 꾸역 꾸역 밀려 든다. 140명 수용에 280명을 채웠다고 한다.

 

 

벽소명월을 질투하는 아이템은 구름과 비이다. 그러고 보면 지리10경은 모두 비에 의해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일출이 그러하고, 낙조가 그러하고, 청류가 그러하고, 철쭉이 그러하고, 운해가 그러하고, 단풍이 그러하고. 다만 연하의 선경은 그렇지 않을 수 도 있다.

 

크고 시원 시원한 산, 도량이 넓은 산의 중간에 자리한 벽소령. 빨간 우체통이 반갑다. 삼겹살 파티가 끝나자 폭우가 쏟아지고 1시간 뒤에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는데 빗물과 함께 먹는 라면도 괜찮다. 아침에 또 라면, 그러고 보니 세끼를 라면으로 때웠구나.

 

코고는 사람들틈에서 가수면 상태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했지만 머리는 의외로 상쾌하다. 지난 밤 비바람 몰아치는 풍경을 어느 누구도 경치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아침에 보니 그것도 훌륭한 지리산의 경치였구나.

 

 

 

(3) 여유있는 산행

 

비가 그친 능선길은 그야말로 녹음방초 우거진 길이다. 덕평봉까지 편안한 산행이다. 피톤치드를 느끼며 청량한 숲을 온몸으로 마음껏 뜰어들인다. 피부에 닿는 청량한 냉기도 기분을 좋게 한다.

나는 아내한테 산행이 주는 유익함의 일부를 자랑한다. 정신에 대한 것은 논외로 하고 경사진 대지에 안전하게 착지하기 위한 온 몸의 긴장된 반응들이 우리를 건강하게 해 준다고.

 

 

덕평봉 옆 선비샘에서 목을 축이고 식술르 보충한다.

유독 주목이 눈에 많이 뜨인다.

천왕봉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지리산에서 항상 광활한 지운을 느끼게 한다.

 

 

아내는 힘들어 할 것 같은데  남한 산성에 몇 번 간 것밖에 없는데 잘 해내고 있다. 45리터의 배낭을 짊어지니 빠를 수 가 없고 오히려 여유있는 산행이 된다. 재철이가 도사의 흉내를 자연스럽게 연출한다. 벽소령을 지나고 덕평봉을 지나고 칠선봉을 지나 영신봉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6.3키로를 3시간이 조금 더 걸려지나 왔다.

 

 

오늘 제일 높은 봉인 영신봉은 낙남정맥 분기점으로 언젠가 우리에게 길을 내어 줄 것이다. 이쪽 비는 섬진강으로 저쪽 비는 낙동강으로 갈라 선다. 세석고원을 바라보는 조망은 몇 년전과 달리 초원지대의 이국적인 풍경이 아니었다. 나무가 많아져서 일게다.

 

짧은 산행이었지만 하루밤을 산에서 지내니 전체적으로는 긴여행이다. 월드컵 개막전을 보고 3시에 자고 대피소에서 선잠을 잤어도 피곤함이 덜하다. 아내와 같이 벗들과 같이 서두르지 않는 산행은 대간에서와 달리 한결 여유가 있다. 시간을 정하지 않은 모처럼의 느긋한 산행.  간식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식수를 채워서 백무동으로 내려 간다.

 

 

(4) 백무동 급경사길

 

이 길은 백두 대간 2차때 눈쌓인 길을 올라온 진입구간이다. 그대는 밤중에 올라 오면서 이렇게 험한 줄 몰랐었다. 급한 내리막길의 경험이 적은 아내는 팽팽한 긴장과 함께 1시간을 보낸 다음 다소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한참을 내려 섰다는 것이다. 두 개의 계곡이 만나는 곳에는 다리를 놓아 건너기 쉽게 되어 있으니 풍광이 뛰어나고 그 다리 아래서 노닐고 싶다. 가내소를 지나 탁족으로 발을 식혀 준다.

 

3시간 넘게 걸려 백무동 매표소에 도착하여 산행을 끝낸다. 아줌마들에겐 다소 빡센 산행이었는데 별탈  없이 내려와서 다행이었다.

 

백무동 느티나무집은 전과 달리 운치가 없어졌다고 한다. 비닐사이딩으로 2층에 그 옆에도 대규모로 공사중인데 그 좋은 계곡옆에 좀 어울리게 지으면 좀 좋을텐데. 어떻게 하는게 어울리는가? 그것은 고민이 많이 필요한 테마이다.

 

규모가 커도 어울릴 수 있고 작아도 안 어울릴 수 있으니 규모나 형태의 문제만은 아니다. 내가 땅 주인이라면 어떻게 지을까? 가벼운 생각들을 툭툭 던지지만 답은 멀리 있다. 막걸리가 일순 돌면서 마누라가 까불지마하니깐, 웃기지마. 지퍼 내리지마. 음담패설은 산행의 감초처럼 같이 한다.

 

"산들은 우리를 유혹한다. 그 장엄함은 존경심을 품게 하고, 명상과 관조에게로 초대한다. 그 당당함, 화려함, 높은 곳에서 우리를 굽어보는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산들을 강간하게 만든다. 산을 기어오르고, 발자국을 찍고, 피켈로 때리고 징을 박아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헉헉거리면서 정상에서 산의 처녀를 빼앗는 것, 그건 모든 성교 중에서 가장 자극적인 성교가 아닌가?

  -희말라야의 아들중에서"

 

(5) 더 얘기하지 마. 또 떠나야 하니까

산행은 정신을 몽롱하게 황홀하게 멍청하게 하나 보다. 예민해야 할 판단을 무딘 충동으로 결정한다. 힘든 산행을 마치고 나면 쉴 것도 같은데 모두 다 또 서로 서로 신이 나는 제안을 한다. 8월 25일~27일 설악의 공룡을 타잔다.

 

7월 말에 3박 4일의 여행

8월 중순 백두산 관광

8월 말에 공룡이라?

 

언제 일하고 언제 쉬나?

산에 갔다 오면은 좀 쉬어야 하는거 아냐?

산에 가는게 쉬는 거라고?

 

아!  더 이상 얘기하지 마. 역마살에 불을 지핀 그대들!  책임져!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네덜란드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축구경기를 본 뒤 깊은 잠에 빠져 든다.

 

2006.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