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기]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종주일자 : 2003년 8월 23일(금) - 8월 25일(일) 2박3일
- 종주코스 : 성삼재-노고단-연하천(숙박)-벽소령-세석-장터목(숙박)-천왕봉-중봉-치밭목-대원사
- 종주대원 : 김정환, 김재철, 송영기, 심재천, 박희용
2. 버리고 떠나기
바람처럼 구름처럼 지리(智異)의 수없는 봉우리들을 조망(照望)하면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주능선 종주길에 나서는 일은 생각만해도 가슴벅찬 일이다. 그래서, 지난 7월초 종주 얘기를 꺼냈을 때 나와 정산,무진은 쉽게 의기투합했다. 이어서 법주사 모임을 계기로 재철이와 정완이가 차례로 합류한다. 정산은 가을의 춘천 마라톤 완주를 위한 지구력 훈련이라는 명목을 어김없이 내걸었고.......
산행을 앞둔 여러 준비과정은 서로의 마음을 다지는 좋은 계기였다. 등반대장을 맡은 지리산지기 무진의 주도면밀한 준비는 단연 돗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무슨 일이든 해내리라 믿었다.
8월 22일, 우리가 기다리던 그 날은 설레임 속에 다가왔고, 약속장소인 지리산 성삼재에 모인 다섯은 초등학교 시절 소풍이라도 떠나는 양 디카앞에서 서로의 모습을 뽐내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은 그 어디냐? 오늘 우리가 머물 곳은 그 어딘가?"
2박 3일의 종주산행 내내 흥얼거리며 화두처럼 놓치지 않았던 음절이다. 산행을 끝내는 그 순간까지 이런 기분이었으면.......
10시 10분, 다도해에 펼쳐진 노고운해(老姑雲海)의 장관을 머리속에 그리며 노고단(老姑壇)을 향해 성삼재를 출발한다. 중간 View Point에서 저 멀리 섬진청류(蟾津廳流)를 굽어보면서, 잠시 발아래 화엄사를 내려다 본다. 각황전, 쌍사자 석등, 대웅전과 천불전...... 당초 생각대로 화엄사를 종주의 기점으로 삼지못한 아쉬움을 속으로 삼킨다.
멋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던 대학1년의 여름이었던가 보다. 캠퍼스 게시판의 수련대회 안내문만 보고 무작정 찾아갔던 바로 그 화엄사, 난생처음인 산사생활이 그저 싫지만은 않았던 그 화엄사다.
알듯 모를듯 어렵기만 했던 신심명(信心銘) 강설, 이틀간 밤새우며 모기와의 전쟁을 치룬 용맹정진, "앗! 뜨거워!" 소리에 조실스님마저 웃으셨던 수계식때의 연비, 그 때 받은 나의 법명 월파(月波)......
지금도 뇌리에 생생한 조실스님의 금강경 법문,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그렇지. 머무름이 없고, 집착하지 않는 그 마음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던가?
어디 그 뿐이랴? 수련대회 마지막 날 아무 준비없이 떠났던 빗속의 노고단 산행, 그 무모함 속에 허기와 추위로 졸도했던 선배 여학생들, 그 들을 소주 두잔으로 살려낸 산장지기 털보 - 지금은 백발이 되어 왕시루봉 아래 산장을 지키고 있다는데........
이런저런 기억을 더듬는 사이 발걸음은 벌써 노고단에 닿아 있었다. 노고단 주변은 각양각색의 야생화가 한창이다. 그 중 노란색의 원추리꽃은 단연 그 자태가 으뜸이다. 자연휴식년제로 노고단 정상부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갈길을 재촉한다. 능선종주의 시작이다. 하지만 초반부터 김 관장이 느끼는 배낭무게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다섯 명 모두 45리터 배낭을 짊어지고 비오듯 땀을 뻘뻘 흘리며 돼지평전을 거쳐 임걸령으로 향한다. 얼마가지 않아 지리산 샘터중 물맛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임걸령 샘터를 만난다. 지난 7월의 당일 종주시에는 새벽 안개속에 샘터 표시만 보고 스쳐 지나간 곳이다. 그 아쉬움을 달래려 다시 떠난 종주가 아니던가!
과연 물맛의 시원함이 페부를 찌를 정도로 짜릿하다. 그 옛날 여기를 무대로 활동했던 임걸년을 잠시 생각해 본다. 민초의 아픔을 구하려 산도적질을 한 그의 삶이 과연 이 시대에도 정당화되는 걸까? 이 시대의 임걸년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무얼하고 있는지?
샘물을 만난김에 이구동성으로 점심을 먹자고 한다. 그리고는 각자의 배낭에 든 떡을 비롯한 행동식, 과일등을 앞다투어 꺼낸다. 2박3일 동안의 비상식을 다 쏟아낼 태세다. 함께 길떠나는 친구들에 대한 깊은 배려인지, 각자 배낭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먼저 줄이자는 속셈인지? 이러면 내일, 모레는 무엇으로 버티나........ 미처 한 나절을 걷기 전에 모두 배낭의 무게를 실감하는 모양이다. 모두 버리고 떠나고 싶은가 보다.
산은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남보다 많이 갖겠다고, 가진 것을 나눠갖지 않겠다고 버티는 세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산에서는 이래저래 가진 것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온다. 결국에는 무소유(無所有)가 만소유(滿所有)임을 가르친다.
이래서 산은 버리고 떠나기의 현장인지 모른다. 눈앞의 배낭만 비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무소유의 넉넉함을 깨닫게 한다.
자, 이제부터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저 반야(般若)에 이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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