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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09 - 영축산은 천 길이나 푸르고

月波 2007. 11. 12. 23:04

낙동정맥 09 - 영축산은 천 길이나 푸르고

 

(1) 여명에 일렁이는 억새처럼

 

산 모습은 가을이라 더욱 아름답고, 강물 빛은 밤인데도 오히려 밝다(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던 옛 문인의 노래를 읊조리며 야간산행에 나선다. 태백에서 남진하던 낙동정맥, 청송 주왕산 구간을 잠시 미루고 훌쩍 건너뛰어 영남알프스로 달려간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마지막 남은 억새의 물결에 취하고 싶은 유혹을 주체할 수 없어서 .........

 

석남터널에서 가지산-능동산 사이의 안부를 오르는데 쏴하고 찬바람이 귀떼기를 때린다. 남녘의 산에도 벌써 겨울이 찾아오고 있구나. 잠시 된비알을 오르지만 어둠속에서 한 곳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 몰입을 통해 얻는 정신적 정화(淨化)의 묘미가 있으니, 밤인데도 강물 빛은 오히려 밝게 느껴졌을거야.

 

능동산으로 향하는 능선에는 낙엽이 수북하다. 점점 동녘은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후미에서 선두반보를 외치지만 정상에서 맞이할 일출에 대한 기대로 걸음은 더욱 빨라진다. 잠에서 깨어나는 낙동의 산하는 점점 그 윤곽이 뚜렷해지고 아침햇살에 너울거릴 억새의 환상적 모습이 그려진다.

 

능동산에서 맞이하는 일출

 

아침햇살에 억새는 잠에서 깨어나고

 

바람에 일렁이는 너의 자태에 숨이 멎더라 

 

 

(2) 돌아가 머물 곳이 다르거늘

 

산길 가노라면 쉬기를 잊고 앉아 쉬다보면 가기를 잊는다(山行忘坐坐忘行)고 했던가? 오늘의 영남알프스가 그러하다. 걷던 길 돌아보니 운문산, 가지산이 뒤를 지켜주고, 길을 나아가면 영축산이 어서오라 손짓하고 있다. 또한 아침햇살에 피어나는 천황산, 재약산이 장쾌한 산군을 이루며 나란히 호위하고 있다.

 

굳이 길을 서두를 까닭이 없다. 뒤에 오던 사람 수없이 나를 앞질러도, 저마다 돌아가 쉴 곳이 따로 있거늘 앞다툴 일이 무엇이랴고 했던 송익필(宋翼弼) 선생의 산행이 이러했을까? 

 

 

붙잡을 일도 붙잡힌 사람도 없이 ......

 

 단풍이 마른 잎 되는 날, 그리움이 더하겠지

 

 

 (3) 길이 없어도 저 길을 가련만

 

배내봉, 간월산, 신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영남의 산꾼들이 붙인 이름, 영남알프스의 진면목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산행객들이 다녔는지 길은 산 길이 아니라 고속도로다. 길이 없어도 저 길을 능히 갈 수 있으련만 고개마다 임도가 뚫려있고, 그래서 마음은 오히려 아쉽다.

 

더없이 푸르른 하늘 아래 한 참이나 서 있다가, 아리랑 릿지가 능선을 만나는 억새밭 한 가운데 둘러앉아 넓은 억새밭을 가슴에 쓸어 담는다. 도시락을 펼쳐들지만 이미 마음이 풍성하니 육신의 허기가 없다. 영축산으로 발길을 향하는데 철모르는 철쭉이 한 송이 피어 철없는 인간들을 나무라고 있다.

 

길이 없어도 저 길을 가련만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어라

 

아리랑 릿지, 릿지가 아리랑인가 ?

 

 

(4) 영축산은 천 길이나 푸르고

 

신불산에서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억새평원은 그 규모도 과히 장관이지만, 솜털처럼 부풀어져 가을바람에 출렁이는 모습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가까이서 보면 그 수수한 자태와 은빛 미소가 뿜어내는 유혹에 절로 빠진다. 바람따라 서걱대는 그 황금물결이 끝나는 곳에 독수리 형상의 봉우리가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산객의 만추지정(晩秋之情)을 한껏 북돋는다.

 

    雲收靈鷲千尋碧  구름이 영축산에 개니 천 길이나 푸르고
    水倒洛東萬里淸  물이 낙동강으로 흘러가니 만 리나 맑구나           
- 경봉(鏡峰) 선사 -

 

님의 모습이 가까워져옵니다. 억새를 만나러 떠난 산행길에서 영축산이 다가오니 온통 님 생각 뿐입니다. 억새 밭의 한가운데 서 있어도, 일렁이는 억새의 솜털을 만지면서도 님의 모습 뿐입니다. 영축산 정상에서 낙동의 마루금을 버리고 한 걸음에 님이 머물던 그 자리로 달려 가렵니다. 이 뜻을 정산은 익히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동행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마음은 그와 함께일 것입니다.

 

허, 허, 허, 삼소(三笑)는 어디 두었는가? 

 

스물은 스물대로, 오십은 오십대로 아름다움이 있으니

 

 

 억새의 은빛이 진들 무엇이 안타까우랴?

 

 

(5) 삼소굴, 경봉스님의 자취를 찾아

 

영축산 정상에서 낙동정맥의 마루금을 벗어나, 잠시 능선을 더 걷다가 비로암을 거쳐 극락선원 가는 직하강 코스를 택해 하산한다. 낙동의 동지들이여 미안하외다. 간절히 님이 그리운데 낙동의 마루금은 잠시 미뤄둘 수 밖에 없었다오. 그 극락선원 삼소굴(三笑窟)의 경봉선사, 스무살 청년이 지천명을 넘기고서야 다시 찾으니 님 가신지 벌써 스물다섯 해라 남은 것은 그리움 뿐이다. 

 

"영축산이여, 때로는 구름도 일고, 때로는 안개도 끼고, 때로는 비도 내리고 하지만, 구름이 일어도 머무름이 없고, 때로는 만화(萬花)가 활짝 피고 새들도 지저귀지만 그것도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영축산의 참모습이다. 산도 이러한데 어떤 글이나 말을 남겨 둘 것도 없는 것이다."

 

님께서는 남겨둘 것 없다고 하셨지만,  미혹한 중생은 그 말씀에서 자그마한 실마리라도 찾고 싶었나이다. 삼소굴 앞에 주렁주렁 열린 감이 님의 얼굴인듯 반갑고, 산정약수(山精藥水)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니 감로수가 따로 없었나이다. 님이 남기신 "물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극락교 돌다리를 건넙니다. 

 

     갈 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물이요,

     어려운 굽이를 만날수록 더욱 힘을 내는 것은 물이다.

 

 영축산 극락선원, 님이 머물던 자리에 법이 익어가고

 

돌다리를 건너도, 안건너도 극락은 그 자리인데

 

경봉선사가 득도(得道)하고 55년간 머물던 삼소굴

님은 흔적조차 안남기셨으니, 야반삼경에 대문빗장을 만지오리까?  

 

 

 

(6) 길의 끝

 

    저 길의 끝은 길의 끝이 아니라 다만 마음 끝이라
    돌아온 길을 돌아보듯 네 마음을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돌밭이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가시밭길이 있었음을
    네 마음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가시에 찔려
    덧난 상처가 많이 있었는가를
    다만 길의 끝에 머문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으니

 

님이 남기신 말씀, 헤아리고 또 헤아리면서 극락암과 삼소굴을 뒤로한 채 통도사로 향한다. 적멸보궁인 금강계단에 다시 엎드리니 가을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흔적없이 사라진다. 내 몸이 머문 길의 끝에서 내 마음이 머문 길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상원사, 봉정암, 법흥사, 정암사, 통도사로 이어진 적멸보궁 순례의 길을 마친다.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 서리맞은 단풍이 봄꽃보다 붉지만

 

님이여, 님이시여, 그 때도 지금도 찰나에 불과하니

 

잠시 님의 품에 안겼다가 다시 길을 나섭니다  

 

 통도사 금강계단에 참배하고 일주문을 나서는데 추상같은 님의 법문이 들려옵니다. 옷매무새를 고쳐보지만 그 가르침을 얼마나 실천할 수 있을지? 자그마한 일에도 심화(心火)를 다스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안타깝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남을 꾸짖을 마음으로 나를 꾸짖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라
       사람을 대할 땐 봄바람같이 하고,  스스로 자숙할 땐 추상같이 하라          
- 경봉선사 -

 

 

   2007. 11. 12.

   한티골 다락에서

   월파(月波, 달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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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선사(鏡峰禪師) : 1892. 4. 9. ~ 1982. 7. 17.

 

1892. 04. 09   경남 밀양 태생

1907. 06. 09.  통도사 입산(은사 성해선사)

1908. 09. 10.. 통도사 수계(계사戒師 청호화상淸湖和尙)

1949. 04. 25.  통도사 주지

1953. 11. 03.  통도사 극락선원 조실

1973. 01. 03   통도사 극락암에서 매월 첫 째 일요일 정기법회 시작

                   - 90노령에도 불구하고 입적할 때까지 법좌에 올라 설법하시니 청중은 수천에 이르렀음

1982. 07. 17.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에서 열반

                   - 임종게(臨終偈) : 야반 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 임종게(臨終偈)

     - 속인들은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고, 선사들은 세상을 떠나면서 임종게(臨終偈)를 남긴다. 

       선사들은 치열한 구도(求道) 끝에 깨우친 진리의 세계를 짧은 시 한 수로 정리하는 것이다.

          시자 명정 : 스님 가시면 보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 모습입니까?

          경봉 스님 : 야반 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경봉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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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세부기록

 

[언   제] 2007년 11월 11일(일)

[누구랑] 강마 낙동돌이 13명

     - 권오언,김길원,김성호,남시탁,박종엽,박희용,백호선,송영기,신정호,윤재용,이성원,정제용,최순옥

[어디를] 석남고개-능동산-배내봉-간월산-신불산-영축산-통도사

 

[시간은]

   2310  서울 대치동 출발

   0410  서울산 나들목

   0450  석남터널 도착

   0600  석남터널 출발

 

   0608  석남고개 안부

   0640  813.2 봉

   0655  능동산

   0730  배내고개

   0811  배내봉(964.9봉)

   0930  간월산

   0950  간월재(20분 휴식)

   1050  신불산

   1130  아리랑 릿지 능선(점심 40분)

   1210  아리랑 릿지 출발

   1300  영축산

 

   1306  비로암 갈림길

   1415  비로암

   1425  극락암 도착

   1445  극락암 출발

   1520  안양암

   1530  통도사 금강계단

   1600  통도사 일주문

  

   1800  통도사 입구(저녁식사후) 출발

   2250  서울 대치동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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