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목 익어가는 귀떼기청에서
- 2008년 8월 31일(일)
- 설악 서북능선
- 길원,오언,월파,성원
(1) 다시 설악에 들다
설악에 든다.
영원에 이르는 길이다.
순간과 영원이 맞닿아 있고,
찰나와 겁이 한 점으로 만나는 곳이다.
바위 틈의 구절초를 만나고
암릉에 떠도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설악을 걷는 것,
오로지 그것 뿐.
산에서 말(言)은 똥이라던
시인(*)이 있었다.
그가 먼 길 가고 없어도
안개 속 높은 산에 잃은 소 찾으러 간다.
일생을 탕진하고도
그 소를 못찾아
늙어서도 설악골을 헤매던
그를 만나러 간다.
(*) 설악산 시인 이성선
1941년 설악산 아래에서 태어나 꼭 60갑자를 살다가 2001년 설악의 하늘로 날아갔다. 60갑자도 '한 호흡'에 불과한 것을 ........ 삶의 절정에서 설악에서 쓴 시집 <산시山詩>에서 선(禪)과 도(道)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시인(詩人)의 병풍(屛風)>, <하늘문(門)을 두드리며>, <몸은 지상에 묶여도>, <밧줄>,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 <별이 비치는 지붕>, <별까지 가면 된다>, <새벽 꽃향기>, <향기나는 밤>, <절정의 노래>, <벌레시인>, <산시>,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등 다수의 시집이 있다.
(2) 마가목 익어가는 설악에서
간밤의 설악주(雪岳酒)가 작년보다 과했을까?
이어지는 오르막에 뉘라없이 헉헉이고
그 모습 안스러운지 점봉산이 웃고 있다.
귀떼기청 너덜길에 마가목이 익어간다.
저 붉은 열매 따다 가슴 속에 술 담그면
고운 빛 그 자태대로 내 마음에 스며들까?
용아공룡 굽어보는 서북능선 암봉 위에
하염없이 넋을 놓고 주저앉은 산객이여
뉘라서 산에 취하면 저러하지 아니할까?
숨겨놓은 진부령 계곡 아지트의 하룻 밤, 설악주(雪岳酒)가 과하면 다시 설악에 아니온다는 성원 형이나,
설악주가 없으면 절대로 설악에 아니든다는 오언 아우도, 다음 설악에서 한결같이 산에 취해있을 것이다.
말없이 웃기만 하던 길원은 어느 편이오?
(3) 멀리서 보는 즐거움
발아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수렴동
용아의 첨봉이 울타리처럼 키를 높여가고
공룡은 그 너머에 선 든든한 버팀목이다.
지난 가을
용아(龍牙)의 첨봉(尖峰)을 오르내리며
가까워서
오히려 범접할 수 없었던 장성(長城)의 웅비(雄飛)를
오늘
귀떼기청에서 아스라히 살핀다.
멀리서
바라보는 즐거움이 쏠쏠하고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난다.
사람도 그러하다.
아름다운 사랑이다.
(4)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큰 귀떼기골, 작은 귀떼기골 굽어보며 절벽의 암봉에 앉는다.
오가는 이 드문 서북능선에서 원경(遠景)에 넋을 뺏긴 마음이 참으로 넉넉하다.
서두르며 걷는 일에 익숙한 산행에서 한 걸음 물러서 먼 산을 바라본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느끼고,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성급했음을 알게된다는 옛 글(*1)을 떠올린다.
(*1) 靜坐然後知 平日之氣浮 守默然後知 平日之言躁 - 명(明)나라 진계유(陳繼儒)
계속해서 진계유(陳繼儒)를 만난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예전에 마음의 병이 깊었음을 알고,
정(情)을 쏟은 뒤에야 평소의 마음 씀씀이가 각박했음을 안다(*2)던
그의 교훈적인 글이 오늘에 갖는 가치는 무엇일까?
지난 일을 되돌아본 연후에야, 문을 닫아건 연후에야 스스로를 성찰(省察)할 수 있다면,
이미 늦고 근본을 놓치는 것이 아닐까?
(*2) 寡慾然後知 平日之病多 , 近情然後知 平日之念刻 , 省事然後知 平日之費閒 , 閉戶然後知 平日之交濫
(5) 이름없는 소(沼)에 손을 담그며
소(沼)에
구름이 지나가고
그 터진 사이로
산이 내려와 제 몸을 씻는다
산향(山香)이
코끝을 두드린다
오늘도
산은 말이 없다
하산 길, 이름없는 작은 소(沼)에 조심스레 손 담그니, 폐부를 찌르는 시원함이 노곤함을 달래준다.
설악과의 작별을 할 시간이다.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6) 입산 그리고 하산
예정하지 않아도 길은 늘 있다.
진부령 아랫계곡에 숨겨둔 비트는 작년 분위기 그대로더라.
새벽녘에 잠시 들린 마지막 터는 홀로 품고 싶은 곳이고.
한 번쯤 더 가도 좋으리라.
선녀를 찾아 나선 길은 대승을 부르는 소리로 끝맺음 했다.
덕분에 쏘가리 몇 마리, 그 녀석들 삶을 빼앗았다.
살생일까? 그 혼을 한계리 강가에 묻었다.
길원,
지리는 땅에 가깝고, 설악은 하늘에 가깝더라.
하나가 후덕하다면 또 다른 하나는 섬세한 것일거야.
그대의 마음 씀씀이로 여름 소망을 이루었구나.
여름의 끝, 이제 가을이다.
가을이 가기 전에
지리에 다시 들고 싶다.
2008. 08. 31.
월파(달무리)
'산따라 길따라 > * 雪岳戀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악의 하루 (0) | 2010.06.14 |
---|---|
용의 어금니, 어디까지 왔니? - 용아장성(2) (0) | 2007.10.17 |
길없는 길을 가다 - 용아장성(1) (0) | 2007.10.15 |
동유광풍(同遊狂風) 동숙취월(同宿醉月) (3) | 2007.02.05 |
세 부부의 추억만들기 - 공룡능선 (0) | 2006.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