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07] 추월(秋月)은 홀로 탐해도 무죄?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1년 2월 13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호남 7구간, 감상굴재-밀재-추월산-대법원 가인연수관
(3) 산행거리 : 16.1 Km(도상거리)
(4) 산행시간 : 8시간 10분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7명 합동산행
- 10인의 동행자 : 오리,성원,월파,정산,오언,지용,은영,성호,제용,리오
2. 산행메모 : 추월(秋月)은 홀로 탐해도 무죄?
(1) 나이 쉰이 넘어야, 인생을 안다(?)
감상굴재에서 새벽산행을 시작한다. 곧장 대각산을 올랐다가 낮은 산야(山野)를 오르내리길 반복한다. 어렴풋이 새어나오는 칠립과 강두마을의 새벽불빛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산골마을과 풍상(風霜)을 함께 한 어은재의 당산나무가 길라잡이를 하고, 눈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휘어 쓰러진 산죽의 모습이 애처롭다. 꺾일지라도 휠 수야 있는가, 그것이 대나무의 기개이거늘.
날이 밝았다. 힘겹게 오른 생화산(498봉) 갈림길에는 선등자(先登者)들이 기다리고 있다. 길은 우측 4시 방향으로 꺾이는데 직진한 선두그룹이 있는 모양이다. 눈밭의 '알바'! 그러기도 드물지만, 그러하다면 고난의 길일 테다. 아마 길을 되돌아올 거야. 향목탕재에서 아침을 먹을 요량으로 선발대로 성호 아우를 보내고 뒤따른다. 버너에 불 피워 뜨거운 아침을 준비하리라.
은행나무 조림지를 지나 도착한 향목탕재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반겨준다. 그 등걸에 앉아 뜨거운 국물을 곁들인 아침을 먹으며 나무의 삶을 생각한다. 나이테만큼 원숙해진 느티나무가 산객에게 삶의 이치를 일깨운다. 신경림의 시(詩)가 떠오른다.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여자를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세상을 안다고/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바람소리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만" - 신경림, 늙은 소나무
나이 쉰이라! 여자, 사랑, 세상을 알 수 있는 나이라고? 이미 쉰을 훌쩍 넘었다. 예전엔 알 듯했던 그것들이 갈수록 모르겠다. 허, 참! 여자, 사랑, 세상을 알면 세상살이 모두를 아는 게 아닌가? 그것을 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향목탕재에 떡 버티고 선 느티나무 정도는 죄다 알까? 그나마 시의 끝 구절 '이렇게 말하지만'이 주는 묘한 여운(餘韻)이 있어, 그것을 곱씹으며 밀재로 향한다.
(2) 올 겨울은 봄날처럼 따뜻하다(?)
밀재를 지나 추월산(秋月山)으로 향한다. 산에는 잔설(殘雪)이 수북하다. 우리들의 호남정맥 산행은 눈을 피하려다 오히려 눈을 만나 벌써 네 번째 연속 설상산행(雪上山行)이다. 엊그제 동해안에는 1미터가 넘는 폭설이 내려 피해가 많은 모양이다. 즐거움도 잦고 넘치면 감흥이 떨어지는 법, 이제 눈보다 봄의 훈풍이 그립다. 입춘(立春)이 지나고 우수(雨水)가 눈앞인데 아직 겨울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추월산 오르는 암봉에서 일행을 보내고 바위에 앉아 숨을 고른다. 멀리 광주 무등산이 안개 속에 봉우리만 오뚝 내놓고 있다. 산야는 온통 눈에 뒤덮여 있다. 옛글을 생각한다. 조선의 이태백이라 하는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이 예순이 넘어 함경도 관찰사 시절(1631년)에 쓴 글이다.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다/ 흰머리 어버이 근심할까 두려워 (*) 欲作家書說苦辛 恐敎愁殺白頭親
북녘 산에 쌓인 눈 천 길인데도/ 올겨울은 봄날처럼 따뜻하다 적었네 (*) 陰山積雪深川丈 却報今冬暖似春
처한 상황이나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눈(雪)도 달리 다가온다. 나이 예순이 넘은 아들이 남녘에 있는 부모가 염려할까봐, 천 길이나 쌓인 눈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봄날이라고 안부를 전하는 그 마음이 따뜻하다. 내 아들 세대에게는 바라지 않더라도, 나는 옛사람이 했던 대로의 자식 도리를 따르고 싶다. 엊그제 설날에 뵈었지만 다시 안부를 여쭈어야겠다. 눈 덮인 높은 산을 즐겨 다니는 줄 알면 뭐라고 하실까?
(3) 혼자 탐하는 절경, 그것은 무죄다(?)
추월산 정상에서 보리암(菩提庵) 갈림길을 지나 전망 좋은 암봉으로 옮겨 한동안 넋을 판다. 한 마디로 일망무제(一望-無際)다. 유난히 검푸름을 자랑하는 담양호도 압권이지만 안개에 가린 무등산의 실루엣은 더욱 환상이다. 수리봉, 심적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의 장쾌한 마루금도 하얀 눈으로 치장하고 산객을 유혹한다.
산행대장에게 보리암 얘기를 꺼냈더니, "여기서 보리암으로 탈출하셔도 됩니다. ㅎㅎㅎ" 흘린 땀으로 갈증을 느끼는 상황에서 달콤한 유혹이다. 그러나 암벽에 자리한 명찰(名刹) 보리암도 보고 싶지만, 어서 오라 손짓하는 눈 덮인 수리봉 암벽을 어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일행을 보내고 혼자 절경을 좀 더 탐하다가 길을 재촉한다.
추월산(731m)에서 수리봉(723m), 심적산(711m)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에는 적설량이 제법이다. 포근함과 아찔함이 공존하는 멋진(?) 길이다. 능선의 적설은 포근함을 주고 내리막의 빙벽은 아찔함을 안긴다. 수리봉을 오르다가 암벽 전망바위에서 배낭을 풀고, 얼마나 담양호를 눈에 담았을까? 이렇게 혼자 추월(秋月)의 절경을 탐해도 죄가 되지 않을까?
심적산에서 잠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다가 하산을 서두른다. 가인 연수관에 도착한 선두그룹이 보이니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하산하는 길은 로프 없으면 낙상(落傷)이 보너스로 주어지는 길이다. 로프 있어도 보너스 받은 분(?)이 있다. ㅎㅎㅎ 큰 부상은 아니죠? 다음 산행에서 웃으며 봐요, 용용 아우님!
몸과 달리 마음은 날아갈 것같은 기억에 남을 산행이었다.
2011. 2. 13. (일) 느지막한 밤에
추월산(秋月山)에서 돌아와
월파(月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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