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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08] 가지마다 물방울 알알이 맺히고

月波 2011. 2. 27. 23:38

 

[호남정맥 08] 가지마다 물방울 알알이 맺히고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1년 2월 27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호남 8구간, 대법원 가인연수관-390.6봉-천치재-치재산-용추봉-오정자재  

   (3) 산행거리 : 12.8 Km(도상거리)

   (4) 산행시간 : 5시간 30분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0명 합동산행

                        - 8인의 동행자 : 성원,월파,정산,오언,지용,은영,성호,제용

 

2. 산행후기

 

(1) 농무(濃霧)에 모든 게 아스라하더라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을 흠모하여, 그의 고향인 전북 순창의 산골에 대법원 연수원을 작년 여름 개관했다. 가인 연수관이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옷깃을 적시는 새벽에 그곳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질퍽한 밭고랑을 지나 들머리 숲속에서 하는 점호에 한 사람이 모자란다. 홀로 남은 이에게 어둠과 안개는 난감한 존재이리라. 발빠른 포도나무 아우가 되돌아가 외로운 영혼을 구제한다.

 

520봉을 지나며 무의식중에 앞장서 걷고 있다. 농무(濃霧)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곳곳에 녹다 남은 설빙(雪氷)의 잔해가 발걸음을 움츠리게 한다. 다행히 빗방울은 생각보다 굵지 않다. 안개에 휩싸인 숲길을 요리조리 살피며 앞장서 간다. 안개의 농도보다 짙은 침묵으로 모두 숲길을 걷는다. 묵상의 시간이다. 새벽 산행은 늘 이와 비슷한 과정의 반복이다.

 

그렇게 천치재를 지나고 임도를 넘나들며 오른 532봉에 희붐하게 아침이 찾아온다. 그제서야 일행이 모여 간식을 먹는다. 그러다가 마음이 급한 이는 먼저 출발하고 몇몇이 남아 한참이나 얘기꽃을 피운다. 오늘 산행은 평소보다 거리도 짧고 고도도 낮다. 거기서 연유하는 느긋함이 묻어나는 장면이다. 쉬엄쉬엄 걸어보자.

 

 

 

비안개 자욱한 산, 온 세상이 아스라하다

 

 

(2) 가지마다 알알이 물방울 맺혔더라

 

치재산을 거쳐 용추봉을 지나자 다시 비안개가 잦아진다. 온 세상이 아스라하다. 그러나 나뭇가지에 맺힌 빗방울은 더욱 영롱하게 느껴진다. 아직 새잎이 돋아나기엔 이른 철이지만 그렇다고 요원하지도 않다. 나뭇가지를 적시는 저 빗방울이 곧 새잎을 돋아나게 하리라. 일행을 먼저 보내고 가지에 맺힌 물방울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시인의 노래를 읊조리며 느릿느릿 걷는다.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 있다/ ......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저 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 엄원태, '물방울 무덤들' 중에서

 

앞산을 넘어 초등학교를 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비 오는 날 나뭇가지에 반짝이던 물방울들, 마치 영롱한 별무리 같았지. 발로 나무를 툭 차면 와르르 쏟아지던 별무리들, 눈물 글썽이며 맺혀있던 그 별들은 슬픔과 기쁨을 모두 아우르고 있었지. 그 물방울 속에 우리들의 수많은 사연이 별처럼 거꾸로 매달려있었지. 오늘 저 나뭇가지의 물방울들이 천진난만했던 그 시절로 나를 초대하는구나.

 

내 마음을 읽었는지 후미에서 동행하던 산행대장은 저만큼 떨어져 따라온다. 오늘은 산행구간이 짧아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어 좋다. 산에서는 경쟁하듯 서두르고 싶지 않다. 이제 호남정맥은 강천산을 목전에 두고 무등산을 향해 남하한다. 남도(南道)는 마루금 뿐아니라 산 아랫마을의 정취도 살피며 넉넉한 마음으로 산행을 하고 싶다.

 

 

 

저 글썽거리는 것들엔 우주가 들어있다

 

 

(3) 산 아랫마을도 풍성하더라

 

다시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진다. 대체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하산을 서두른다. 마지막 염소농장, 마른 나무를 뜯어 먹는 염소의 모습이 기이(奇異)하다. 아직 연초록 잎들이 돋아나지 않아서일까? 염소풀 주는 일을 깜빡 잊은 주인장에 대한 반항일까? 생사의 문제가 걸리면 저토록 삶은 치열해지는 것일까? 오정자재에서 일찍 산행을 끝낸다.

 

영산강 발원지인 가마골 용소(龍沼)를 차분히 둘러보고 담양 죽녹원으로 옮긴다. 일행들이 죽녹원 탐방을 하는 동안, 홀로 인근의 관방제 숲을 바라보며 빗속을 잠시 걸었다. 대나무 숲에도 관방제의 숲에도 같은 비가 내렸을 게다. 이제부터 남도의 문화유산을 가까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서울로 향한다.

 

공주 정안휴게소에서 딸을 위한 써프라이즈(Surprise)를 준비하고 서울에 도착한다. 그러나 반가운 얼굴들의 호출에 그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다. 빗속에 42.195Km를 달린 그들의 무용담과 자긍심이 몇해 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딸과의 약속이 흐트러졌지만, 그것도 하나의 삶의 모습이지 않는가? 다시 양재천에서 새벽 달리기를 시작하는 스스로를 그려본다.

 

 

 

영산강 발원지인 가마골 용소(龍沼)

 

 

2011년 2월 27일

호남의 산에서 돌아와

월파(月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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