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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10] 괘일산, 그 암릉에서 누린 안복(眼福)

月波 2011. 3. 27. 22:25

 

[호남정맥 10] 괘일산, 그 암릉에서 누린 안복(眼福)

 

1. 산행개요

 

   (1) 산행일시 : 2011년 3월 27일(일), 무박산행

   (2) 산행구간 : 방축리-316.9봉(고지산)-봉황산-서암산-설산 안부-괘일산-무이산-과치재-연산-방아재 

   (3) 산행거리 : 18.8 Km(도상거리), 실거리 23.5Km

   (4) 산행시간 : 8시간 30분

   (5) 산행참가 : 좋은 사람들 25명 합동산행

                        - 7인의 동행자 : 성원,오리,월파,오언,지용,성호,제용


2. 산행후기 

  

(1) 산행에 나서는 마음

 

열 번째 호남정맥 산행이다. '10'이라는 숫자의 의미가 묘하다. 매듭 하나 묶는 기분이다. 그 매듭 두 번은 더 묶어야 하니, 외망포구까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다. 오늘은 2도 3군 5면(*)에 걸쳐 그 이름이 붙은 산만 6개나 오르내릴 것이다. 고지산(316.9m), 봉황산(235.5m), 서암산(455.0m), 괘일산(441.0m), 무이산(304.5m), 연산(508.1m)이 그들이다. 마루금에서 살짝 비켜난 설산(522.6m)까지 다녀오면 7산이다.

      (*) 전북의 순창군 금과면, 전남의 담양군 금성면과 무정면, 전남의 곡성군 옥과면과 오산면

 

산 높이로만 보면 올망졸망한 야산(野山) 지대인데, 그 동안 호남정맥의 산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7개의 산을 오르내리면 후반에 지칠 것이다. 마루금에서 비켜난 설산(522.6m)을 다녀올 수 있을지, 마지막 연산(508.1m)을 가볍게 오를 수 있을지? 두 곳이 오늘 산행의 분수령이 되지 싶다. 신발 끈을 꽁꽁 묶는다. 산으로 드는 마음이다.

 

새벽의 숲에 하현달이 떳다. 새벽까지 우리를 기다렸을까? 느낌이 포근하다.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지만 봄바람은 봄바람이다. 대나무의 서늘한 기운에 잡념은 사라지고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김윤아의 봄노래를 흥얼거리며 고지산(316.9봉)을 내려와 88고속도를 횡단한다.

 

"봄이 오면/ 연둣빛 고운 숲속으로 어리고 단비 마시러/ 봄 맞으러 가야지 ...... / 봄바람 부는 흰 꽃 들녘에 시름을 벗고 ......  /

 마음엔 온통 봄이 봄이 흐드러지고 들녘은 활짝 피어나네/ ........" 

 

저기, 저 산야에도 봄이 오고

 

 

(2) 세상으로 내려온 마루금

 

미명(微明)이 찾아오고 봉황산(235.5m)을 지난다. 산 아래 목동리 마을의 고즈넉한 아침이 한 폭의 수채화 같다. 나지막한 산에, 넓지도 좁지도 않은 전답(田畓)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세상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넉넉하지 않아도 부족할 것도 없는 안온한 마을처럼 보인다. 망원렌즈로 사진 한 장 남기려다 곧 마음을 접는다. 마음에 품었다가 나중에 '다시 찾는 호남'의 첫 번째로 저 마을에 가보리라.


비산비야(非山非野)의 길을 걷는다. 작은 산골마을 하나가 길을 막는다. 상신기 마을이다. 산이 마을로 내려온 것일까? 마을이 산으로 올라온 것일까? 2004년 1월 백두대간을 시작하며 마루금은 높은 산에만 있는 줄 알았다. 산자분수령의 이치를 깨달아갈 무렵 남원 주천면의 가재마을의 논밭을 지나 수정봉을 오르게 되었다. 그때서야 마루금은 사람 사는 낮은 세상에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신기 마을의 허름한 민가에 [박영호 설순례]라고 쓰여진 문패 하나가 눈길을 끈다. 대간과 정맥을 하며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내려온 마루금을 여러 차례 지났다. 그러나 산골마을의 문패가 눈에 들어오기는 처음이다. 더구나 [박영호 설순례]처럼 문패에 부부의 이름이 함께 적힌 것도 신기하다. 남녀의 평등과 부부의 일심이 여기 산골까지 어김이 없구나.

 

대간돌이들의 참새방앗간이던 남원 매요마을이 생각난다. 마루금이 통과하는 마을에 할머니가 걸쭉한 막걸리와 가벼운 안주로 산객을 반기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여기서도 한 잔 할 수 있다면 ......"  이른 아침에 고요한 산골마을을 외인(外人)이 헤집고 지나니, 개 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킨다. 그 와중에 철없는 산객은 뜬금없이 술타령을 했다. 술 마시지 않아도 얼굴 빨개져 잽싸게 서암산으로 향한다.

 

해발 455m의 서암산을 오르며 제법 땀을 흘렸다. 산불감시초소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파른 오르막을 성큼성큼 오르는 이들이 부러웠다. 나 홀로 힘들었다. 뾰족한 핑계를 찾을 수 없었다. 단지 호남의 산이라는 알 수 없는 이유밖에. 따라온 후미그룹과 함께 서암산에 오른다.

 

저 푸른 소나무처럼, 저 해맑은 웃음처럼

 

 

(3) 산같은 산! 말과 글이 무슨 필요랴?

 

설산(455.0m) 갈림길에서 바로 괘일산(441.0m)으로 향한다. 적당한 지점에서 설산을 되돌아본다. 유리처럼 햇살에 빛나는 암봉이 장관이다. 세모시 옥색치마 입은 여인의 속살이 저러할까? 설산낙조(雪山落照)니 설산귀운(雪山歸雲)이니 하는 호사가들의 8경(八景) 타령이 헛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설산으로 향한 이는 그 치맛자락에 안기고 괘일산으로 직행한 이는 부러운 듯 그 모습 지켜본다.


괘일산(掛日山), 그 이름처럼 해는 이미 중천에 걸려있다. 낙락장송이 암벽과 더불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손부채 부치며 앉아서 푹 쉬고 싶다. 전후좌우 사통팔달 조망도 압권이다. 더 이상 무슨 말과 글이 필요하랴? 다만, 금강경의 한 말씀(*)을 유념하면서도 욕심 많은 중생이 카메라에 그 풍경 몇 장을 담지 않을 수 없다. 그 모양, 그 상(相)이 모두 허망한 것임을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

 

 (*)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모양(相)으로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이 모든 것이 상(相)이 아닌 줄을 직관(直觀)한다면 곧 마음을 깨친 것" 이라는 가르침

  

 

저 암벽에서 자라는 소나무같이

 

 

저 산처럼, 저 바위처럼, 저 웃음처럼

 

 

(4) 춘란(春蘭)이 지천(至賤)이더라

 

무이산(304.5m) 자락에는 자생 춘란(春蘭)이 지천(至賤)이다. 이제 하나 둘 꽃이 피고 있다. 눈(雪)이 잦고 유난히 길었던 겨울을 지내고 꽃이 피는 것이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꽃은 무슨 꿈으로 봄을 기다렸을까? 봄에 스스로를 활짝 꽃피우겠다는 꿈, 그리하여 화사한 세상을 꾸미겠다는 꿈, 그런 꿈으로 묵묵히 봄을 기다렸을 게다. 겨울 이겨낸 봄꽃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일 게다.

 

'꿈을 향해 걷는 사람은 매서운 계절을 이겨낸 꽃 같은 기억을 지니고' 있다고 노래한 시인이 있다. 겨울 추위를 이기고 봄에 아름다운 꽃이 피듯이, 삶의 세찬 풍파를 견디고 꿈을 향해 꿋꿋이 가라는 노래일 것이다. 힘들어도 좌절하지 말고 지향하는 바를 따라 올곧게 나가야겠지요. 꿈은 시련을 넘어서 이루어지는 법, 무이산의 춘란(春蘭)이 그 사실을 일깨우는 산길을 걷는다. 

 

난 알고 있었지/ 아름다운 사람들은 아름다운 추억을 가졌고/ 푸른 사람들은 푸른 꿈을 지니고

난 알고 있었지/ 꿈을 향해 걷는 사람들은 깊은 마음으로/ 매서운 계절을 이겨낸 꽃 같은 기억들을 지니고

그래 저 꽃이 필 때는/ 세찬 비바람 견디어내고/ 하늘 보며 별빛을 보며/ 그날을 기다렸겠지

 - 홍광일, 저 꽃이 필 때는-

 

시인은 또 이렇게 노래했다. "보이는 꽃만/ 꽃인 줄 아느냐// 내 마음에 그대를 담으면/ 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피지 않더냐"

그렇지요. 눈앞에 보이는 꽃만 꽃인가요? 보이는 것만 보면 제대로 못 보는 것이지요. 마음 닫으면 가까워도 보이지 않고, 마음을 열면 멀어도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담긴 그대는 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지요.

 

겨울 이겨낸 꽃이 더욱 아름답다

 

 

과치재에서 에너지를 보충하고 쉬엄쉬엄 가파른 연산(508.1m)을 오른다. 앞에서 천천히 오르니 모두 내 뒤에 꼼짝없이 쉬엄쉬엄 따른다.

연산에서 활강하듯 방아재로 내려와, "내 마음의 그대, 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에게 산행종료 소식을 전한다.

"여보, 산에서 잘 내려왔어요!"

 

 

2011년 3월 27일

산에서 안복(眼福)을 누리고 돌아와

월파(月波, 달무리)

 

 

<PS>  " (괘일산) 암릉에 우뚝 매달린 소나무 같이, (무이산) 솔숲에 조용히 꽃망울을 내민 야생 난처럼 살아가야 할 텐데 ......"

            산행을 함께 한 이튼(제용) 아우의 Comment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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