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쌍봉사(雙峰寺) 3층 목탑 대웅전
쌍봉(雙峰)이라, 절 앞 뒤의 산봉우리 둘이 오똑하다. 쌍봉(雙峰)이 철감선사의 호(號)이기도 하니 선사(禪師)와의 인연이 가볍지 않다. 그 창건시기는 불분명하나 철감선사(澈鑒禪師, 798∼868)가 주석하며 선풍(禪風)을 진작했다는 기록이 분명하고, 그 제자 징효(澄曉) 선사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을 개창했으니 그 위신 또한 반듯하다.
숲길을 걸어 산사(山寺)로 가야 운치가 있는데 쌍봉사는 그 기대를 저버린다. 엊그제 지은 듯한 일주문(一柱門)은 겨우 '쌍봉사자문'(雙峰獅子門)이라는 편액만 걸었을 뿐 아직 단청(丹靑)도 않았다. 어차피 숱한 세월에 바래질 빛깔, 서둘러 치장하여 무엇하리! 해탈문을 지나니 3층 목조탑 모양의 대웅전이 우뚝한 모습으로 중생을 맞이한다. 절로 숙연해진다. 이런 복(福)을 누리다니.
높은 키가 웅장함보다 기품을 품었으니 보는 이의 마음이 절로 편안해진다. 근래에 새로 지어 고풍이 아쉬울 뿐이다. 1980년대 후반 화재로 보물이라는 허명(虛名)도 함께 타버렸으니, 옛모습 그려보며 마음을 가지런히 한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대웅전의 목조삼존불상이 옛모습대로 온전하니 그것은 이웃 마을의 농부가 지은 복이란다. 불타는 대웅전으로 달려온 농부가 삼존불을 한 분씩 업고 나왔단다.
가운데 주불이 석가모니불이요, 좌우에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모셨으니 그 배치 또한 특이하다. 밖에서 보면 첨탑처럼 솟은 삼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한 칸짜리다. 대웅전 뒤의 극락전으로 오르는 계단 양 옆에 오래된 단풍나무가 꿋꿋이 서 있다. 대웅전이 불탈 때 제 몸을 살라 극락전으로 옮겨붙는 불길을 막았단다. 그 몸통에 그날의 상흔이 역력하다. 불타다 남은 몸통은 볼품이 허해도 그 기백이 으뜸이더라.
(2)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와 부도비
선사의 부도로 가는 길가의 대숲이 주는 청량감이 산객의 마음을 맑게 한다. 돌계단과 담장, 그 안의 철감선사부도(澈鑒禪師浮屠)와 철감선사부도비(澈鑒禪師浮屠碑)가 긴 세월을 머금고 있다. 철(澈, 물 맑을 철)에, 감(鑒, 거울 감)이라, 철감은 곧 맑은 거울이었으니 선사는 그 이름처럼 정신을 일깨우는 맑은 거울이었으리라. 국보와 보물이라는 명찰은 선사의 도(道)에 비하면 뜬구름처럼 허망한 것이리라.
옥개석은 귀퉁이마다 깨지고 상륜부가 사라진 모습에 가슴이 찡해진다. 옥개석 아래 몸통의 각 면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사천왕상과 비천상은 깊이 새기고 작은 옷깃 선까지 돋을 새김을 해 놓았다. 단순한 형태미가 아니라 도드라진 입체감이 돋보인다. 옥개석 지붕의 기왓골과 막새의 연꽃문양, 석조예술의 절정이다. 몸돌을 받치고 있는 연꽃문양, 기단부는 8면에 사자를 새기고 아래는 원형으로 구름문양에 용이 엉켜있는 모양이 새겨져 있다.
철감선사부도비로 옮긴다. 귀부의 거북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입안에 여의주를 물고서 재롱을 피우고 있다. 몸통에 비해 통통한 발이 오히려 안정감을 더하고, 오른 발을 살짝 치켜든 모습이 금방 움직일 것 같다. 그러나 비문이 사라지고 없음이 안타깝다. 비문에 적힌 사연이야 어차피 숱한 비바람에 지워지는 법이나 그 몸통이라도 남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 생각도 껍데기를 추구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