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따라 길따라/* 백두대간

(03) 수정봉에 피는 설화(雪花)

月波 2005. 6. 27. 23:47

[백두대간 종주기] : 가재마을-수정봉-여원재(3차)

백두대간 제 3차 산행은 국립공원 지리산의 경방기간 입산통제로 3구간(화개재-노고단-성삼재)및
4구간(성삼재-만복대-고기리-주천 가재마을)을 5월 중순 이후로 순연하고, 5구간을 먼저 종주함


1. 종주 기록

(1) 일 시 : 2004.3.7
(2) 구 간 : 남원 주천면 가재마을(운천초교)-수정봉-여원재
(3) 산 행 : 도상거리 6.6Km, 소요시간 3시간

(4) 참 가 : 21명
----- 권오언, 김경애, 김성호, 김영이, 김춘자, 김현숙, 남시탁, 박희용, 손영자, 송영기, 오영명,
오영명 부인, 윤재용, 이성원, 지용, 홍명기, 이상덕, 맹혜경, 함인성, 백청용, 서종환

(5) 산행일지

- 07:05 개포동 국민은행 앞 출발
- 08:20 옥산휴게소(조식 20분)
- 10:30 88고속도로 인월 나들목
- 10:50 운천초등학교 입구(산행 시작)
- 11:05 가재(노치)마을 노치샘
- 11:15 가재마을 뒷산 노송지대
- 12:05 수정봉(804m)
- 12:30 입망치
- 13:05 무명봉(700m)
- 14:05 여원재 도착및 중식
- 15:05 여원재 출발(상경)
- 18:35 서울 개포동 도착


2. 산행기 - 설화천국을 다녀와서

(1) 설산(雪山)으로 떠나는 길

백두대간 3차 출발을 앞둔 6일 오후 늦게까지도 충청도 일원의 고속도로는 이틀째 마비상태가 계속
되고 있었다. 강마 게시판에는 여러가지 의견이 올라왔지만 나는 조용히 출발의 시간을 기다렸다.
충분히 사전에 대비하면 기후는 특별히 문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

향후 3년간 계절을 반복해가며 폭설,폭우,폭염등 기후변화나 암벽, 암릉, 너덜등 지형상의 제약이
반복될텐데..... 문제는 이런 외부조건이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부여건(가족, 친구, 일)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며, 그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의 지지속에 대간길을 마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생각해왔다.

3월 7일 아침 7시를 앞둔 시각 개포동역에는 대간길을 함께할 산우(山友)들이 한사람씩 모인다.
이 아침에 모인 사람 모두 진부령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간다. 07시 04분이 되자
자칭 [사랑하는 영자씨]를 마지막으로 태운 버스는 더 이상 머뭇거림없이 바로 개포동을 출발한다.
시간을 잘 지켜 기분이 좋다. 21명이 서로의 눈빛을 마주치며 무사산행을 기원한다.

잠깐 사이에 버스는 궁내동 T/G를 벗어나 남으로, 남으로 길을 향한다. 오늘 밟을 대간 마루금을
머리속에 그리며 잠시 차창을 내다본다. 주변 산야는 눈으로 덮힌 은빛세상이다.
아! 그런데 ..... 흐렸던 하늘이 걷히고, 동쪽하늘에 아침햇살이 힘차게 솟아오르는게 아닌가?
붉은 해무리가 설산(雪山)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고속도로가 소통된 것만도 다행인데
날씨까지 축복을 하니, 지리산 자락 수정봉에 쌓여있을 눈을 러셀하며 걷게될 오늘의 산행이
은근히 기대된다.


백두대간 3차산행을 밝혀주는 아침햇살(경부 고속도로에서, 2004. 3.7.)




(2) 마을에 내려온 대간(大幹)

서울을 떠난지 미처 4시간이 되기 전에, 오늘의 종주기점인 남원 주천면 가재마을(노치마을)로
가는 초등학교 입구에 우리를 내려놓은 버스는 눈길에 미끄러지듯 운봉쪽으로 돌아간다.

가재마을로 향하는 길에서 보는 동서남북의 지리산야는 아침햇살을 받아 온통 은빛강산이다.
순백의 산호가 바다에 깔린 듯 설화천국(雪花天國)이다. 1, 2, 3차의 종주길의 날씨가 이렇게
쾌청하니 지리산 마고할미도 우리의 산행길을 싫어하지 않으시나 보다.

노치마을로 들어가는 논길, 눈에 덮혀 평범하게 보이는 이 흙길이 백두대간의 마루금이란다.
이 길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은 운봉이요, 왼쪽은 남원이란다. 길 오른쪽에 떨어진 빗방울은
운봉의 광천과 진주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지고, 길 왼쪽으로 떨어진 빗방울은 굽이굽이
섬진강의 청류가 되어 흐르다가 남해로 흘러간단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 산은 스스로 물길을 갈라놓는다고 했던가? 여기 걷고 있는 이
눈덮힌 평탄한 길이 바로 대간 마루금이니, 산줄기인 것이다. 대간이 몸을 낮춰 사람사는 평지의
마을로 내려와 낮은 곳으로 임하니,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물을 건너지않고 백두산까지 이어질 대간길이라 ..... 새삼 의욕이 솟는다.


가재마을로 가는 벌판너머에 수정봉이 보인다




(3) 마음의 문(門)을 열고

물맛좋다는 가재마을 노치샘터 주변, 여기에도 백두대간 이정표와 리본이 어지러이 달려있다.
길을 재촉해 마을 뒷산을 오르니 수정봉 가는 길목에 우뚝 선 아름드리 소나무 네그루를 만난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는가 싶다. 저 노송을 통과해야 마루금을 밟을 수 있으니 백두대간의
관문(關門)인 셈이다.

관문(關門), 이름 그대로 빗장을 열고 들어가야하는 문(門)이 아닌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두드린
많은 문(門)들이 떠오른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 거쳐야하는 길이 많아 수없는 문을 두드리며
지내온 날들이 스쳐간다. 두드려 빗장을 열기도 하고, 탈락하기도 하면서 ....

백두대간을 오르는 길목을 가로막은 문, 노송이 친 빗장의 의미를 헤아려본다. 이 산문(山門)에
들어오는 자, 누구든 세간의 욕망에 물든 마음을 씻고 들어오라는 가르침처럼 느껴진다. 지난 날
성취욕으로 가득찼던 그 욕심을 털어버리고, 오늘은 겸손한 마음으로 마루금을 걸어보고 싶다.


가재마을 뒷산의 노송




(4) 이심전심(以心傳心)

이제 설화가득한 산길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눈이 부시도록, 눈이 시리도록 눈꽃이
아름답다. 오랜 세월을 벗으로 지내온 정산(正山)과 앞뒤에 서서 눈길을 걸어 오른다. 사그락,
사그락..... 뽀드득 뽀드득.....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라는 걸 알 수 있고, 귓전을 맴도는 발자국
소리로 설산을 걷는 느낌을 교감한다. 말없이도 통하는 지심(知心)이다.

정산(正山)은 이름그대로 [바른 뫼]처럼 늘 변함없이 한결같은 친구다. <파페포포투게더>에서 본
글귀가 생각난다. 10년이 넘도록 매일 똑같은 옷만 입는다고 친구에게 핀잔을 듣는 얘기이다.

"난 새옷보다 입던 옷이 더 좋아."
"그래도 가끔씩은 새로운 옷도 입어 줘야지, 계속 같은 옷만 입으면 지겹잖아?"
"재윤아, 너랑 나랑 몇 년 친구냐?"
"응...그러니까 초등학교...벌써 24년이 됐네."
"맞다. 사람이나 헌옷이나 지겨울 때가 종종 있는 거야. 하지만 '지겹다'는 건 '변함이 없다'는
거 아닐까?"

그렇다. 변함없이 한결같다는 것은 늘 새롭게 변화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확실한 믿음과
초지일관의 심성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한결같아야 서로 의지하면서 바른 길로 이끌어 줄
수 있고, 그리하여 평생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리라.

나에게도 언제나 편안하게 다가오는 헌옷같은 친구, 눈길을 밟으며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을 알 수 있는 친구, 정산(正山)이 있어 늘 행복하다.


노송을 지나 수정봉 오르는 은빛 숲의 터널




(5) 수정봉을 오르며

가재마을에서 1시간이나 걸어 올랐을까? 수정봉이 시야에 들어올 법도 한데 소나무 숲에 가려
정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숲길에 펼쳐진 눈꽃, 상고대들이 연출하는 설경은 과히
설화천국(雪花天國)이라 부르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간간이 숲길 좌우로 펼쳐지는 남원과
운봉의 설원(雪源)도 빼놓을 수 없는 장관이다.

양지녘 숲속의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짙푸른
하늘아래 새털처럼 엷은 흰구름이 눈덮힌 큰 고리봉에 피어나고 있다. 바래봉, 덕두산 능선도
선명히 시야에 들어온다. 참으로 지리산은 순간순간 변화무쌍하다. 조금 전만 해도 먹구름이
서북능선을 뒤덮고 있었는데......

이리저리 카메라에 담느라 시간을 보내는데 후미조가 도착하여 달콤한 곶감으로 입맛을 즐긴다.
산행길에서 섭취하는 당분은 언제 먹어도 달콤한 보약이다.


수정봉 오르는 길에서 본 바래봉 하늘




(6) 입망치에 누운 영혼

수정봉(804m)을 지난 발길은 제법 가파른 내리막길을 거쳐 봄날처럼 햇살이 따뜻이 비치는
입망치에 이른다. 먼저 도착한 선두와 중간그룹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느라 삼삼오오 부산하다.
이번 대간 길은 숲속에는 별달리 휴식처가 없고, 군데군데 무덤근처가 휴식공간을 제공해준다.

이번 대간길에는 유난히 무덤이 많다. 모두가 양지바른 명당으로 대부분 눈이 녹아 있다.
그기 누워 있는 영혼은 더없이 행복하리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봄에는 바래봉을 물들이는 화려한 철쭉에 반하고, 여름에는 맑은 소(沼)와 담(潭)을 이루며 흘러
내리는 계류(溪流)에 귀 기울이며, 가을에는 서북능선 만복대와 정령치의 억새, 단풍을
즐기다가, 겨울이면 눈이 시리도록 피어있는 설화(雪花)에 혼을 맡기고 쉴 수 있으니.......


수정봉 오르는 양지녘에 선 강마




(7) 높은 산만 산인가?

입망치를 떠난 발길은 군데군데 핀 설화를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다. 눈으로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에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문명의 이기덕에 여러 사람과 오래오래 설화천국의
모습을 공유할 수 있다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한참을 숲속의 설경에 빠져있던 일행은 700m 무명봉을 향해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이제까지와
달리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을 정도의 키 작은 소나무밑으로 길이 나있다. 촘촘이 산을 덮어
하늘을 가리고 있는 소나무 아래로 허리굽혀 길을 걸어야 한다. 힘겹게 산을 오른다.

산이라 해서 높은 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무라 해서 키 큰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걷는 산은 비록 낮은 곳으로 임하면서도 대간의 본성을 유지하며, 정감있게 우리에게 한걸음
가까이 다가온다. 나무도 높은 산으로 올라 갈수록 키가 낮아진다. 나무마져도 높은 곳을 오를수록
스스로 몸을 낮추는데, 우리네 인간이 꾸려가는 삶의 모습은 어떠한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바래봉을 향해 핀 설화




(8) 태극종주를 꿈꾸며

700m 무명봉을 지나 여원재로 향하는 길목에서 오랫만에 툭트인 경치를 조망할 수 있어 즐겁다.
가재마을 노송을 지나 내내 숲속의 나무아래를 걸어야 했는데 가슴이 시원히 �리는 기분이다.
바로 발아래에는 여원재의 상징인양 우뚝솟은 암봉이 제법 멋을 부리고 솟아있고, 저 멀리
북쪽으로는 다음 구간에 이어갈 고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덕두산, 바래봉 능선이 일렬로 서 한눈에 들어온다. 눈덮힌 지리산 서북능선을
감상하는 묘미가 꽤 쏠쏠하다. 가슴에 새로운 바램이 용솟음치기 시작한다. 바래봉 능선에
철쭉이 한창 필 5월 중순에 또다른 꿈에 도전하고 싶다.

덕두산을 기점으로 성삼재까지의 서북능선, 주 능선(노고단-천왕봉), 중봉을 거쳐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동부능선을 완전종주하는 지리산 태극종주를 꿈꿔본다.
그 때 동참할 사람 여기여기 붙어라 !!!!!


무명봉(700봉)에서 본 지리산 서북능선의 덕두산, 바래봉




(9) 여원재(女院峙)에 서린 전설

여원재다. 오늘 산행의 종점이다. 왼쪽으로 남원가는 길은 급경사의 내리막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고, 오른쪽 운봉, 인월가는 길은 평탄한 고원지대다. 고개마루에는 여인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채 돌하르방 모양의 여인상이 세워져 있다. 누군가 그 슬픈 사연을 얘기한다. 왜구들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가슴을 도려내고 자신을 지켰던 여인의 한이 서려있다고 한다.

여원재는 또다른 애환이 담겨있는 곳이다. 여원재는 지리산 장터목이나 화개재를 넘어 온
물산이 백무동을 거쳐 남원으로 향하던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삼한시대이래 전략요충지로
전쟁터의 아픈 상처가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운봉(雲峰)의 인월(引月)도, 인풍(仁風)도, 황산(黃山)벌도 온통 흰눈에 덮혀 있으니,
역사의 뒤안길을 되새김할 틈새가 없다. 이성계 장군도 아지발도도 눈속에 묻혀있다. 다만 여원재
고개마루에 서있는 여인상만이 옛일을 더듬게 할 뿐이다.


여원재의 여신상




(10) 짧은 산행, 넉넉한 대간길

오늘의 산행을 정리해본다. 지난 2차 산행이 백두대간 종주의 가장 힘든 산행으로 기록되겠지만,
오늘 산행은 아마 가장 편안한 산행으로 기록될 것이다. 어찌보면 밋밋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를, 짧고 낮은 산행구간이다.

그러나,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이치를 생각하며,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갖는 의미를 가슴에
새기며 걸을 수 있었다. 산은 높은 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대간도 구름위에 높은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도 키 큰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마음에 가진 욕심을 털어버리고 홀가분하게 걸었다. 소유가 적을수록 번뇌가 적다는 무소유의
가르침을 반추하기도 하고, 소유가 가져다주는 물질적 유혹에 대한 집착을 떨처버리면서.......

또한, 참으로 여유롭게 걸으며 가슴에는 많은 생각을, 카메라에는 멋진 설경을 원없이 담았다.
여유로움이 주는 마음의 넉넉함을 한껏 즐긴 산행이었지 싶다. 빨리 서두르지 않고, 충분히
여유를 간직한 채......

산에서 빨리 서두름은 자기도취의 만족감을 주고, 천천히 여유로움을 견지하는 것은 마음에
편안함을 안겨준다. 매사가 얻음이 있으면 잃음이 있는 법이니, 구태여 산에서 호불호(好不好)의
2분법적 사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마음의 여유에 수반하는 풍성함을 즐기면 될 뿐이다.

그러기에, 가래떡을 듬뿍넣어 끓인 여원재의 라면맛은 지리산 구간의 굴국보다 더욱 풍성했고,
그기에 더하는 설화천국(雪花天國)의 하산주(下山酒) 한 잔의 맛은 더욱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지 싶다.


3차종주후 여원재에서의 기념사진





[추신]
더 걷고 싶은 아쉬움을 남긴채, 설산을 마음껏 누빈 3차산행을 마감하고 버스에 몸을 싣는다.
오후 6시 35분, 개포동에 도착하여 집으로 향하니 예상외로 빠른 귀가에 아내는 반가움과
놀람이 교차하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