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따라 길따라/* 백두대간

(12) 무진(無盡)과 함께한 대간길

月波 2005. 6. 29. 16:55

무진(無盡)과 함께한 백두대간(12차)

 

 

 

1. 산행기록

(1) 산행일시 : 2004년 9월 25일(토) 08:30-17:00 (8시간 30분 소요)
(2) 산행구간 : (황점)-삿갓골재-동엽령-빼재(백두대간 12차)
(3) 산행거리 : 총 23.0 Km (진입 3.4Km, 대간길 19.7Km)
(4) 구간운행 : 무진(無盡)과 함께 둘이서

(5) 운행기록

08:30 황점마을 출발
09:50 삿갓골재 산장, 누적 3.4Km, 5분 휴식
10:45 무룡산(1,491m, ), 누적 5.5Km, 5분 휴식
11:25 돌탑
12:05 동엽령, 누적 9.7Km
12:41 휴식처(점심, 15분)
13:06 백암봉, 누적 12.0Km, 5분 휴식
14:09 횡경재(1,350m), 누적 15.2Km, 5분 휴식
14:33 지봉 안부
14:46 지봉(1342.7m), 누적 16.9Km, 5분 휴식
15:14 월음령(달음재)
15:35 대봉(1,263m), 누적 19.4Km, 5분 휴식
16:05 갈미봉, 누적 20.4Km
17:00 빼재, 누적 23Km


2. 산행후기

(1) 대간길 땜빵에 나서며

바쁜 일상속에서도 용하게 일정을 맞추며 상반기 내내 펑크없이 잘 달려온 대간길이 하반기들면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펑크가 나니 조바심이 난다. 어쩌면 7월과 8월의 백두대간은 내게 시절의 연이 닿지 았았나보다.

지난 1월에 시작한 백두대간 걷기는 지리산 4구간과 덕유산 2구간을 미답(개인적인 펑크)으로 남겨둔채 소사고개까지 와 있다. 다음 산행이면 삼도봉을 넘어 충청도 땅을 밟을텐데..... 언젠가 땜빵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할 무렵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침 추석연휴가 5일씩이나 되는게 아닌가?

진주로 귀향하는 길에 시간을 내어 빠뜨린 구간을 걷기로 하자. 좋은 생각이다. 혼자할까? 동행이 있으면 좋을텐데..... 누구 없을까? 구간은? 어느 구간부터 먼저 보충울 할까?

마침 진주의 무진(無盡)과 연락이 되어 오랫만에 함께 산행을 하기로 한다. 작년 여름의 지리산 종주이후 1년여만에 무진과 함께하는 산행이다. 어린 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천진한 그의 눈매가 새삼 기대된다. 자신의 몸을 녹여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양초의 화신마냥 그는 늘 자신을 낮추고 주위를 편안하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갖고있다. 오래됨이 새로움보다 좋은 것은 이런 친구가 있음일거다.

산행지는 당일산행으로는 거리가 긴 삿갓골재-빼재구간을 하기로 한다. 진입구간인 황점을 출발하여 둘이서 무념무상, 빡세게 걸어보자고 뜻을 모은다. 걷다가 시간이 허락하면 대간길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북덕유산 정상, 향적봉을 다녀오기로 하고.......


(2) 삿갓골재의 아침

9월 24일 밤, 추석을 나흘 앞두고 일찌감치 진주의 고향집을 찾는다. 하루 밤을 부모님 곁에서 자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서는 아들녀석을 어른들은 못내 불안해 하신다. 나이 오십을 바라보고 있어도 어머님에게는 늘 어린 아들이니, 언제나 어른의 마음을 편히 해 드릴 수 있을지?

아침 7시 진주시내에서 무진(無盡)을 만나 함양 서상으로 향하는 진주-대전간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세번씩이나 내게 입산을 거부했던 북덕유산이 오늘은 나를 받아들일까? 그리하여 내 몸을 덕유산 능선에 맡겨볼 수 있을까? 은근히 초조한 마음이다. 자연의 순리는 거슬릴 수 없는 것이니......

서상 나들목에서 남덕유산을 바라본다. 아침 잠에서 깨어나는 남덕유산을 눈에 담으며 영각사 입구를 지나 황점으로 길을 재촉한다. 황점의 그 느티나무 아래에서 차를 보내고 무진과 삿갓골 계곡으로 들어간다. 입산이다. 산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08:30)

삿갓재로 오르는 길에는 지난 초여름과 달리 억새와 들꽃이 한바탕 잔치를 하고있다. 계곡초입에서 만나는 억새는 능선길의 그것보다 훨씬 오동통 살찐 모습이다. 비바람에 흔들리며 본연의 모습대로 거칠게 자랐을 지리산 만복대의 억새밭을 머리속에 그리며 점점 삿갓골 계곡으로 몸을 들이민다.

된비알 오르막에서 숨을 헐떡이며 얼마나 걸었을까? 눈에 익은 급경사 계단길이 나타난다. 삿갓골재가 지척임을 말해준다. 계단 중간의 샘터에서 한바가지 물을 퍼 마시고, 곧장 계단을 마져 오르니 삿갓골재 산장지기가 나와 반갑게 맞아준다. (09:50)

삿갓골재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은 저멀리서 아련히 춤을 추고있다. 천왕봉은 금방 하얀 새털구름 사이로 숨어버리고, 오른쪽 남덕유산 허리너머에는 반야봉이 살며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햇살을 받으며 피어오르는 아침안개는 역시 높은 산에서 보아야 제격이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조금 늦은 모양이다. 아침안개가 걷혀가는 산에는 가을 볕이 따사롭게 비추며 나뭇잎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3) 무룡산을 넘어 동엽령으로

산장지기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잠시 땀을 식힌다. 무진(無盡)과 함께 산장앞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아마 이번 산행에서 무진과 둘이서 찍은 유일한 사진이지 싶다.
무룡산을 오르면서야 삿갓골재 산장의 보배인 검둥이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떠나오기 전 산장지기에게 검둥이의 근황을 물어 봤어야 하는데...... 언제 또다시 삿갓골재를 찾을 수 있을지 ......

무룡산 오르는 길엔 여기저기 기대하지 않았던 단풍나무가 물들어가고 있다. 단풍을 보러, 암릉의 묘미를 맛보러 설악의 공룡능선을 가자는 남대장의 제안에 귀가 솔깃했었는데...... 때이르게 물들어 있는 몇 그루의 단풍나무가 설악을 찾지못한 내게 조그만 위안이 된다. 대간길에는 제법 낙엽이 떨어져 쌓여가고 있어 걷는 발걸음이 한결 편안하다. 양탄자를 밟는 기분이다.

드디어 무룡산 정상이다.(10:45) 무룡산, 용이 춤추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했던가? 평범한 산객의 눈에 용이 춤추는 모습이 보일 리 없다. 다만 여기저기 붉게 물들어가는 단풍나무 잎이 시선을 끌 뿐이다. 어쩌면 저 단풍잎 하나하나가 춤추는 용의 비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심히 꽃잎을 살필 뿐이다. 망상이지하며 피식 웃는다. 상념을 버려야 있는 그대로,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무룡산을 지나 30분을 걸었을까? 자그마한 돌탑이 나타난다. 산행객들의 소원을 모아 작은 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린 형상이다. 잠시 쉬면서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어본다. 딸에게, 아들에게, 아내에게.....
다시 길을 걷는다. 오늘따라 무진(無盡)의 발걸음에 힘이 빠져보인다. 왜 일까? 나는 뭔가 �기듯 빨리 길을 가고, 무진은 그저 느긋느긋 걸으며 힘든 모습이다. 어느듯 동엽령이 발아래에 있다.(12:05)


(4) 걸림이 없는 산행

동엽령 주변에는 손상당한 대간의 원모습을 되살리려 애쓰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인다. 지난 7월말 노고단 정상부에 올랐을 때 훼손된 모습을 복원하려 애쓰던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번 훼손된 자연의 모습을 인간의 힘으로 되살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고산지대의 초목은 더욱 그러하다.

동엽령 왼쪽 무주쪽 산자락을 내려다본다. 칠연계곡이다. 여름철 칠연계곡의 물소리를 듣고싶다. 문득 맑은 물에서 자라는 송어가 생각난다. 몸에 밴 식탐은 산에 와서도 어쩔 수 없나보다.
어느 해 여름 강원도 계방산 근처 운두령 계곡에서 맛보았던 송어회를 생각하곤 침을 꿀꺽 삼킨다. 싱싱한 야채를 썰어 콩가루와 참기름을 넉넉히 뿌리고 맑은 물에서 자란 송어회와 태양초 고추장을 버무려 먹는 그 맛이란.......

백암봉을 향해 가파른 오르막을 오른다. 무진(無盡)이 점점 뒤로 쳐진다. 내 마음 한 구석에 서두름이 있고, 무진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여유로움이 있다. 나는 목적지를 정하고 빈틈없이 그 길을 달려가고, 무진은 자연과 호흡하며 발걸음이 옮겨지는 만큼 쉬엄쉬엄 간다. 나는 어딘가에 얽매여 산을 걷고 있고, 무진에게는 걸림이 없는 산행이 계속된다. 무진은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로운 산행론을 내게 들려준다.

오늘 내게 있어 그 걸림은 무엇이던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산만 보고 걷지못하는 그 얽매임은 무었이던가?
펑크난 백두대간길을 땜빵해야 하고, 그것도 무박2일로 해야하는 힘든코스를 서둘러서 당일로 해야하는 강박관념이 있다. 게다가 시간을 더 내어 백두대간길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중봉, 향적봉의 북덕유산 정상길을 함께 밟고 싶은 욕심까지 있으니....... 내게 이런 마음의 얽매임이 있고, 무진(無盡)은 그것을 털어버렸으니...... 정산(正山)의 말처럼 훌훌 털고 때를 기다리면 안될까?

무진(無盡)이 내게 말한다. 산에 와서는 힘들면 쉬었다가, 때로는 잠시 햇살아래 눈을 부쳤다가, 새로운 산 길에 마음이 끌리면 당초 길을 버리고 다른 길로 바꾸어 산행을 한다고...... 서두름이 없이, 정하고 얽매임이 없이, 마음이 내키는 대로, 발길이 닿는대로...... 그래서 산에 오면 세상사에 구속됨이 없이 언제나 자유로워진다고......

그래. 그런거야. 금강경에서 설(說)하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心)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겠지. 이 도리를 직접 몸으로 행하려면 얼마나 더 마음을 닦아 산을 다녀야할지? 아니, 얼마나 더 산을 다녀야 머무름이 없는 그 마음을 낼 수 있을지?


(5) 중봉과 향적봉을 뒤로한 채

백암봉을 오르는데 뒤로쳐진 무진(無盡)의 모습이 안보인다. 길가의 그늘아래 나무등걸에 걸터앉아 잠시 기다린다.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한다. 아침에 준비한 김밥이 제법 맛있다. 배를 깍아 나눠 먹는데 그 맛 또한 일품이다. 허기를 채우고 잠시 휴식을 하다가 무진을 앞세우고 백암봉(1,490m)에 오른다.(13:06)

백암봉에서 바라보는 중봉과 향적봉은 덕유평전 너머 지척에 우뚝 서있다. 향적봉을 다녀오는 일은 뒤로 미룬다.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이 있지만, 얽매이지 않고 마음을 털어버리려 애써본다. 아쉬움이 남아 있어야 북덕유를 다시 찾아와 향적봉을 오를거라는 기대를 하며 곧바로 빼재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지봉(못봉) 안부로 내려서는 길에도 제법 낙엽이 쌓여 있다. 길의 푹신함이 카페트인양 느껴져 그져 달리고 싶은 욕망이 솟는다. 조금씩 뛰어본다. 쿠션이 정말 좋다. 무진은 여전히 쉬엄쉬엄 걸으며 자유자재다.

횡경재에 이르기 직전에 경북 상주에서 왔다는 중년의 부부를 만난다. 도시락에 흰쌀밥을 싸와서 숲속에서 부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부부는 우리에게 그들이 돌아갈 길을 묻는다. 송계사 계곡에 차를 세워두고 왔다니, 향적봉을 다녀오면 늦을테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야할 것같다. 그저 산이 좋아 길을 나선 산행객이니 향적봉 산장쯤가서 하루 쉬고 가는 방법도 있고......


(6) 빼재는 멀지 않았는데

지봉(못봉, 1,342.7m)에 오르니(14:46), 이제 가야할 길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낀다. 하지만, 지도를 펼쳐보니 아직도 세시간 가까이 걸어야 할 것같다. 서서히 오늘의 산행길이 힘들어지는 때로 접어드나보다. 심기일전하여 걸어야지. 지봉 정상에서 무진과 간식을 먹으며 원기를 북돋우고 기합을 넣어본다.

지봉에서 월음령(달음재)으로 내려서는 길은 제법 가파른 내리막이다. 무진은 다시 오를 길이 걱정이라면서도 내리막은 잘도 내려간다. 길에는 낙엽이 수두룩하다. 겨울의 잔설을 털고 봄기운을 산에서 느끼기 시작한 것이 함양 백운산과 무령고개에서의 일인데, 벌써 산에는 겨울을 준비해야 하나보다. 낙엽을 밟으며 지팡이도 없이 내리막을 달린다. 내리막길에는 여러 산행객의 손때묻은 나뭇가지가 버팀목이되고 지팡이가 되어준다.

월음령을 지나 대봉(1,263m)을 오른다. 길 좌우에 억새와 싸리밭이 도열해 있다. 억새도 싸리도 나의 키를 훨씬 넘게 자라 좌우로 빽빽이 들어서 있다. 그 길을 헤치며 터널을 만들어 길을 뚫고 올라간다. 힘들게 땀흘려 오르는데 정상부의 억새밭 옆에는 짙은 보라빛 엉겅퀴꽃이 그 자태를 자랑하며 반겨주고, 이에 질새라 구절초도 흐드러지게 피어 대봉을 덮고 있다.(15:35)


(7) 그들은 양초의 화신인가?

지봉, 대봉, 갈미봉을 거쳐 마지막 무명봉(일명 빼봉)에 오르니, 빼재로 오르는 거창 상수내 마을의 꼬불꼬불한 길이 바로 발아래에 있다. 최종 목적지인 빼재가 지척이라는 얘기이다.

뻬봉에서 서울의 정산(正山)에게 전화를 건다.(16:45) 백두대간을 걷고있는 나를 대신하여 그 시간에 양재천에서 내몫의 토요장달 자봉(自奉)을 하고있는 중이다. 목소리가 밝다. 그저 고맙기만 하다. 나를 대신해 영원한 우리들의 누님, 사랑하는 영자씨와 함께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그에게 오늘의 종주가 무사히 끝나가고 있음을 제일 먼저 알린다.

빼재로 내려서는 길목에서 무진(無盡)에게 얘기한다.

"그 동안 삿갓골재에서 빼재에 이르는 백두대간길을 종주하려고 세차례나 북덕유 종주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매번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태풍이 길을 막기도 하고 갑작스런 스케쥴이 길을 막기도 했다. 번번히 북덕유는 나의 입산을 거부했다."

"그런데, 오늘 정산(正山)과 무진(無盡)의 넉넉한 덕에 힘입어 네번째 도전에서 삿갓골재에서 빼재에 이르는 북덕유를 종주할 수 있었다. 모두가 양초의 화신같은 자네들의 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맙고 또 고맙다"

무진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며 길을 내려서니 바로 빼재다.(17:00)

다시 생각해봐도 네 번만에 이룬 북덕유종주는 그 친구들의 덕에 힘입은 바가 크다. 늘 고마운 벗들이다. 오로지 자신의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양초의 화신인양 무진(無盡)과 정산(正山)이 베푸는 덕이 아니었던들 어찌 거세기만 한 북덕유산 입산길이 쉽게 열릴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