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따라 길따라/* 백두대간

(17) 설화천국, 그 영하 40도!

月波 2005. 6. 29. 17:06
 

설화천국에서 보낸 하루 - 백두대간 17차

 

 

1. 프롤로그 : 태백의 함백산(咸白山) 가는 뜻은?

흔히 태백의8승(八勝)으로 천제단, 문수봉, 주목(朱木), 일출, 황지, 검룡소, 구문소, 용연동굴을 꼽는다. 하지만, 달리 보면 태백, 그중 함백산(咸白山)에는 재미있고 특이한 것이 너무나 많다. 높은 것, 긴 것, 먼 것, 처음인 것등 손에 꼽히는 것이 즐비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도로(포장된 고개), 기차역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 한 때 가장 긴 철도터널로 이름을 드날렸던 곳, 한강의 물줄기가 거슬러 가장 멀리 올라가는 곳, 구비구비 3만리(?) 낙동강의 최초 발원지 .........

오늘 우리는 서울에서 장장 514Km의 한강 물줄기를 거슬러 한강의 발원지(發源地)를 찾아 간다. 눈꽃으로 은빛세상을 이루고 있을 그곳, 태백의 함백산(咸白山, 1572.9m)으로 간다.
함백의 기슭 어디엔가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으러 간다. 금대봉과 은대봉에서는 자장율사가 숨겨놓은 금탑과 은탑의 비밀을 캐어보고, 백두대간에서 가지치는 낙동정맥의 분기점에서는 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시원(始原)을 찾아 보리라.

함백의 설원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간절한 기도를 하는 마음, 금대봉이 답을 하랴, 은대봉이 답을 하랴? 1300리 굽이굽이 이어지는 한강, 가장 멀리 내륙을 관통하는 낙동강의 물줄기, 천의봉이 그 뜻을 알겠는가, 삼수령이 헤아리겠는가? 말없는 함백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자.


함백산 오르는 길에서 본 정선 고한의 탄광지대 산야


2. 화방재에 피는 꽃

지리산 천왕봉의 장엄한 일출로 시작했던 백두대간 마루금 걷기는 1년만에 추풍령을 지나 속리산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이번 산행은 오던 길을 잠시 뛰어 넘어 눈꽃(雪花)을 보러 함백산으로 간다. 당초 계획에 따르면 금년 년말에나 지나갈 함백산을 미리 밟는 셈이다.

금년 첫 대간산행이다. 어린아이마냥 들뜨고 상기되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닐테다. 새책, 새신발, 새옷으로 시작해 새차, 새집에 이르기까지 새것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던 습관이 나이들면서 조금은 바뀌어간다. 그 중에서 산을 통해 만나는 새친구들이 참 좋다.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지만, 산을 통해 만나는 그들은 언제나 좋은 친구다. "산이란 올라갈 때는 남이지만 내려올 때는 친구가 되는 곳"이라는 어느 광고카피처럼 .....

오늘의 출발지는 꽃의 천국, 꽃방석고개라고 불리는 화방재 마루턱이다. 화방재는 무슨 꽃의 천국일까? 겨울에는 눈꽃이 방석처럼 피어있는 설화천국(雪花天國)이다. 그 눈꽃을 밟으며 어둠을 뚫고 함백산에서 맞을 일출을 기대하며 밤길을 달려 화방재로 향한다, 마침 최근 며칠사이 강원도 산간지방에 폭설이 쏟아졌으니 러셀을 하면서 눈꽃속에 파묻힐 생각에 가슴이 설레인다.

새벽 3시를 조금 넘긴 시간, 화방재에 도착한다. 무릎을 덮을 만큼 눈이 쌓여 있다. 눈속에 길이 제대로 보일리 없고, 어둠을 뚫고 러셀을 하며 산행을 해야한다. 한편으로 걱정이 앞서지만, 눈속을 헤집고 다닐 기대에 흥분이 된다. 아침을 챙겨먹고 새벽 5시 화방재를 출발한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속에서 길을 헤치며 수리봉으로 향한다.

수리봉 오르는 된비알에는 전봇대 굵기의 침엽수 군락이 어둠속에서도 쉽게 눈에 뛴다. 낙엽송이라 부르는 일본 잎깔나무인듯 하다.(함께 눈길을 겯던 김XX님은 메타세콰이어인듯하다고 함) 무릎까지 발이 빠지는 눈속에 서서 한아름이나 되는 잎깔나무를 안아본다. 잎깔나무는 침엽수이지만 가을이면 단풍이 들고 잎이 떨어지는 낙엽수다. 한겨울 눈밭에서 잎떨어진 잎깔나무를 보면서, 저 나무처럼 누구나 삶의 진솔한 모습을 엿볼 수 있으리라는 건방진(?) 생각을 해본다.


함백산에 핀 설화


3. 만항재의 별빛

수리봉 지나 창옥봉 가는 길에서 동쪽하늘에서 조금씩 여명을 느끼기 시작한다. 헤드랜턴을 끄고 흰눈의 밝기에 의존해 길을 걸어본다. 군데군데 산죽(山竹)이 눈속에서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송백(松栢)은 추운 겨울에 푸르름을 알 수 있고, 산죽(山竹)은 눈속에서 푸르름을 뽐내는가? 공자 《논어》 자한(子罕)편의 비유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 를 되새기며 만항재를 향해 눈길을 걷는다.

하늘에 별빛이 서서히 그 밝기를 잃어갈 무렵 어느 넓은 고개길에 이른다. 소위 우리나라 고개(포장도로)중에 가장 높다는 곳이다. 어디일까? 매스컴이나 관광안내 책자에서 흔히 지리산 정령치(해발 1,172m)를 높다고 말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란다. 오늘 산행의 말미에 걷게될 싸리재(두문동재)의 높이도 1,268m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도 최고는 아니란다. 영예(?)의 주인공은 바로 여기 만항재로 해발 1,313m란다.

함백산 능선의 만항재에서 멀리 발아래를 굽어본다. 정선 고한의 광산촌이 눈에 들어온다. 저 기슭에 한 달전 태백산 천제단을 다녀가던 길에 들른 신라고찰 정암사(淨巖寺)가 있을 것이다. 더운 여름날 정암사를 다시 찾고싶다던 생각을 떠올린다. 그 때 만항재에 다시 올라 시원한 바람을 가슴에 안고 싶다. 맑은 날 밤에 차를 몰아 만항재에 오르면 이마에 흐드러지게 별빛이 쏟아져 내릴 것 같다. 맑고 깊은 정암사 계곡에서 서식하는 냉수성 어류, 열목어도 쏟아지는 별빛을 느낄 수 있겠지?

잠시 상념에 젖은 사이 아침햇살이 하늘에서 쏟아져내린다. 아쉽게도 함백의 찬란한 일출을 디카에 담지못했으니 아쉬움이 크다. 지난 번 태백산행에서도 디카 조작실수로 일출을 날리고 ...... 만항재에서 함백산을 향해 길을 걷는다. 그런데, 앞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선두조들이 지나갔을텐데....... 지세를 살피니 대간 등산로와 표지리본을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 길로 지나간 흔적이 없으니 선두조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앞장서 러셀을 할 수 밖에...... 허리까지 빠지는 오르막 눈길에서 수백m 러셀을 하니 힘들고 지쳐 산행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난다.


함백산에 핀 설화


4. 함백산(1,572.9m)의 바람

만항재에서 러셀을 하며 어렵게 한 봉우리를 넘으니 임도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류하며 제법 러셀이 된 길이 나타난다. 이제사 선두조의 행적을 추론할 것 같다. 눈앞에 펼쳐지는 함백산 정상을 향해 군데군데 로프에 의지하며 된비알을 오른다. 혹한에 꽁꽁 얼어 제대로 작동을 않는 Battery를 녹여가며 설화를 디카에 담기 시작한다.

함백산 정상에서 둘러보는 조망은 과히 장관이다. 어제까지 눈이 내려 대기오염을 씻어간데다 오늘 날씨가 맑아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짙푸르다. 가까이 태백산에서 일월산, 백운산, 가리왕산을 조망할 수 있다. 정상에는 함백산의 바람이 온몸을 파고든다. 살갗을 에는 바람이 숨쉬기조차 힘들게하지만 한동안 함백산 정상에서 시간을 보낸다.

산경표(山經表)에는 함백산을 대박산(大朴山)이라 적고있는데 크고 밝은 뫼라는 뜻인가 보다. 상함백(은대봉),중함백,하함백(함백산)으로 이어지는 함백산, 오늘은 하함백에서 중함백, 상함백으로 길을 간다. 함백산 서쪽 계곡에는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정암사(淨巖寺)가 자리하고 있으니 언제 함백산을 찾아도 마음이 포근할 것 같다.

정상을 떠나 중함백과 은대봉으로의 길을 나선다. 거센 바람에 앞에서 러셀하고 지나간 길도 찾기 힘들다. 정상을 내려서자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주목과 고사목 군락이 펼쳐진다. 설화가 가득한 주목(朱木)이 발길을 잡고 놓지를 않는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의 오랜 삶에 묻어나는 관조(觀照)를 읽을 수 있다.

모두 주목과 고사목 주변에 펼쳐진 설화천국에서 떠날 줄 모른다. 눈꽃이 빚어내는 상고대, 주목에 핀 설화, 그 속에 즐거워하는 산친구들을 디카에 담느라 꽁꽁 얼어붙은 손길이 바쁘기만 하다. 어제 밤 늦게 먼 길을 달려올 때의 생각을 떠올려본다.
"어둠을 뚫고 달려가는 보람이 있을까? 평소에 쌓아놓은 복덕(福德)이 빛을 발휘할까? 아니면 어질고 착한 이웃을 만나 무임승차를 해볼까? 함백의 일출을 기다리는 마음, 함백의 설화천국에서 보낼 기대와 설레임이 현실화될까?"
모두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오늘의 대간길은 그저 즐거울 따름이다.

 


함백산 주목에 핀 설화


5. 은탑, 금탑은 어디에?

함백산을 떠난 발길은 이제 거칠 것없이 눈 속을 걷는다. 중함백(1,505m)을 지나 싸리재(1,268m)로 가는 길에 은대봉(1.442.3m)을 올랐다가 내려가야 한다. 은대봉 아래 어디엔가에는 자장율사의 은탑이 숨겨져 있을텐데, 1,400여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아무도 찾지 못하니 ....... 욕심을 버려야 그 은탑이 보일텐데, 버림의 도(道)를 깨치기가 쉽지만은 않은가 보다. 은탑도 못찾으니 금대봉의 금탑 찾기를 어찌 기약할 수 있겠는가?

은대봉 서쪽에는 지하에 무진장의 석탄이 매장되어 있어 한때 탄광이 성행했던 삼척 고한의 전성기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쪽을 보니 은대봉을 뚫고 나온 기차길 하나가 자그마한 시골 기차역을 만들어 놓고 있다. 싸리밭골이라 불리는 동네에 유명한 기차역 하나가 있다.

어느날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어왔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철도터널은 어디일까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철도역의 이름은? 아니면, 낙동강 최상류의 협곡을 따라 기차여행을 해본적이 있는가요? 그 북쪽 시발지인 추전역의 이름을 들어본적이 있나요?

오지중의 오지인 정선의 고한에서 함백산 너머 태백으로 기차를 타고가려면 높고 긴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철도터널이라 불리던 정암터널(4,505m)이다. 최근 전라선에 슬치터널(6,128m)이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 최장이었다. 그래도 우리 세대에게는 정암터널이 가장 긴 터널로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정암터널을 빠져나오면 태백선의 추전역이 해발 855m에 자리잡고 있다. 추전역은 철도역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낙동강 협곡열차여행의 시발지로도 유명하다. 그 추전역앞 청국장집에 오늘의 선두조 5명은 일찌감치 산행을 마치고 추위를 녹이며 청국장에 당귀차를 달인 곡주를 마시고 있었으니....... 그들은 진정 오늘의 대간길을 제대로 걸은 것일까? 단지 그들만 알고 있을뿐!

추전역에서 시작되는 낙동강 협곡열차여행은 낙동강 상류의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협곡지형을 통과하며 경북 봉화의 춘양역까지 이어진다. 추전에서 몸을 싣고, 승부∼양원∼분천∼현동으로 이어지는 협곡구간의 모든 역에 차례로 정차했다가 춘양에 이르면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바로 그기가 아닐까?

어느 꽃피는 늦은 봄날을 택하든, 설화만발한 한겨울에 눈꽃여행을 즐기든 협곡은 그 자리에 있을텐데, 길 떠나지 못하고 얽매여 살아감은 무슨 연유일까? 이미 마음의 나이가 너무 든것일까?


눈 덮힌 중함백의 모습


6. 에필로그 : 인생이란 사막을 걷는 것?

인생은 종종 산을 오르는 일, 등반에 비유되곤 한다. 목표를 정해놓고 그기에 도달하려는 치밀한 계획과 준비의 과정이 흡사하기 때문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마라톤도 인생과 유사하다. 목적지가 있고 완주하기위한 일련의 훈련모습이 목표와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 인생과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인생을 등산이나 마라톤이 아닌 [사막을 걷는 일]에 비유한 스티브 도나휴의 은유는 한번쯤 생각해볼만하다. 인생을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결과중심으로 생각하기보다, 나아갈 목표조차 희미한 상황에서 길을 헤쳐나가는 과정중심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등산과 마라톤과 달리 사막을 걷는 일은 "언제까지, 어디까지"라는 식의 [목표]보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지, 갈수는 있을지" 하는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길이다.

사실 삶이란 산을 오르거나 마라톤을 완주하듯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네 삶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등산이나 마라톤의 길보다 어쩌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걷는 사막의 길이 더 많은 것은 아닐까?

그동안 산을 오르내리며 새겨왔던 생각,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삶이 인생이라는 생각에 다소의 변화가 생긴다. 우리의 삶에는 지도도 필요하지만 나침반이 더욱 소중할 때도 있으리라. 동서남북을 가늠할 수 없는 사막에서는 지도보다 방향을 가늠해주는 나침반이 더욱 필요한 법이니......

그래도 나는 산이 좋고, 여전히 산에 기대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을 속일 수 없다. 남남인듯 보이지만 산은 언제나 친구로 다가와 속진(俗塵)에 물든 나를 흔쾌히 받아준다. 그리고는 세속의 그 먼지를 남김없이 씻어주기에.......

비록 당초 계획했던 금대봉과 천의봉, 삼수령, 피재까지 못가고 싸리재에서 오늘 산행을 접어야 했지만 아쉬움은 없다. 서울로 향하는 길에는 영월의 얼어붙은 논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봄이면 해빙을 하고 동강줄기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올 것이다. 겨울의 한 복판에서 아직 봄을 말하기 어려운 시간이지만, 겨울은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던 이 광호 교수의 말을 되새기며 봄날의 태백을 그려본다.

" 얼음으로 덮인 겨울 저수지에 가 본 적이 있는가? 겨울 저수지는 계절이 만들어 내는 가장 겨울다운 풍경을 이룬다. 그곳에서 만나는 결빙기의 풍광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숨죽인 정지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겨울은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


중함백에서 내려서며 본 은대봉, 금대봉으로 이어지는 대간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