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기]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종주일자 : 2003년 8월 23일(금) - 8월 25일(일) 2박3일
- 종주코스 : 성삼재-노고단-연하천(숙박)-벽소령-세석-장터목(숙박)-천왕봉-중봉-치밭목-대원사
- 종주대원 : 김정환, 김재철, 송영기, 심재천, 박희용
10. 에피로그
[ I ] 소리없는 가르침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헤어진다는 것이 사람과의 이별이라면 떠난다는 것은 장소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지리산과의 이별인 셈이다. 그것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정리하고 버려야 할 것이 많은데 생각 뿐이다. 앞만 보고 살아온 날들에 대한 편린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대부분 사람들은 삶을 마치 경주라고 생각하는 듯해요.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려고 헉헉거리며 달리는 동안,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놓쳐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경주가 끝날 때쯤엔 자기가 너무 늙었다는 것,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중에서 -
그렇다. 정말 가슴에 와 닿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7월의 무박1일 지리산 당일종주는 진 웹스터의 얘기와 너무 흡사하다. 산행에 있어 빨리 해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산행은 경주마처럼 앞만보고 목적지를 향해 달려온 안타까운 우리들 삶의 축소판이었지 싶다.
그래서 나는 삶의 참모습을 찾으려 종주산행을 다시 꿈꾸었고, 그 길을 떠난 것이었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2박3일의 넉넉한 일정으로......
우리는 주위를 쳐다볼 틈도 없이 조급하게, 앞만 보고 살아온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리산은 소리없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가르쳐주었다.
샘터에서 목축이며 쉬기도 하고, 들꽃의 향기에 취하기도 하고,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바람 부는대로 이리저리 제몸을 맡기면서도 본 모습을 잃지않는 들풀의 모습에서 순응력을 배우면서 살아가는......
[II] 아침을 사는 사람
오늘 우리가 가는 곳은 그 어디냐?
오늘 우리가 머물 곳은 그 어딘가?
지리(智異)의 능선에서, 두류(頭流)의 산하에서 우리가 목이 메도록 흥얼거렸던 그 노래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
마치 [아침을 사는 사람]처럼 우리는 남들이 간 길, 남들이 다 자리잡은 길을 접어두고 새로운 길을 걷고 싶었는지 모른다. 두렵고 혼자여서 쉽게 떠날 수 없던 그 길을 [우리]로 뭉쳐 함께 떠났던 것이다. 우리는 경쟁자가 아니라 동반자요, 격려자였기에 하나가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도전은 더욱 값진 것이었는지 모른다.
또한 우리가 가는 발자국 하나 하나가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이 된다고 믿었기에 우리는 더욱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눈 덮힌 들판을 걸을지라도 네 발걸음을 어지럽게 말라던 서산대사의 선시를 생각하면서.
답설야중거 (踏雪野中去) 부수호란행 (不須胡亂行) 눈덮인 광야를 지나갈 때엔 함부로 걷지 마라
금일아행적 (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 (遂作後人程) 오늘 내 발자국은 마침내 후세들의 길이 되리니
- 백범 김구선생이 어려운 결단을 내릴 때마다 마음에 되새기고 즐겨 휘호로 썼던 시로, 서산대사가 지은 선시 (禪詩)로 알려져 있음
그래서 우리 모두는 서로가 좋은 친구임을 새삼 확인하며, 하나되어 자연의 섭리를 배우고 물흐르듯이 순리를 실천했다. 또한 미지의 길을 걸으며 새로운 도전을 하며 삶의 내면을 살찌게 한 셈이리라.
[III] 행복했노라,하노라,하리라
종주를 마무리하는 하산길, 써리봉 능선에서 정산(正山)이 들려준 사진 이야기를 곰곰히 반추해 본다.
사진은 빼기의 예술이란다. 이것 저것 모두 담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를 강조하기 위해 주변을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는 빼기의 예술이란다. 사람들은 자꾸 더하기를 하려하지만 사진을 찍다보면 버리기, 빼기에 익숙해져야 한단다. 그래서 사진은 빼기의 문제를 참구하는 참선과도 같은 예술이란다.
그것도, 사람의 생각이 아닌 사진기의 감정으로, Eye of Camera로 찍어야 한단다. 사진기의 감정이라...... 벽을 느낀다. 정말 참구해 볼만한 화두다.
많은 단어들을 다시 떠올려 본다. 이제는 모두 빼고, 버려야 할 단어들이다. 하나씩 영상에서 지워나가며 생각을 정리해 본다.
두류의 물맛도, 지리의 연봉(連峰)도,
기암괴석과 기화요초, 운해와 선경,
고사목, 시대의 이단자들,
연하천, 장터목의 밤,
낙조와 천왕일출까지......
앞의 모든 것을 다 빼고, 버린다해도 지울 수 없는 것이 있다.
좋은 친구, 비누의 화신,
반야의 자태, 빼기의 예술......
버릴 수 없는, 지워지지 않는 그 단어들이 있어
우리는
마냥 행복했노라.
한 없이 행복하노라.
언제까지나 행복하리라.
무진아, 정산아, 재철아, 김관장,
반야봉의 후덕한 품새를 그리며,
공룡능선을 함께 오를 그날을 준비하자.
[IV] : 친구에게 보내는 추신
친구들아,
유평리 계곡, 그 비트에서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겠지?
세족, 탁족을 넘어 완벽한 탁신이라고 정산은 말하더구나.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를 잊고
개구장이 악동의 모습으로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며.....
농주 한 사발에 곁들인
산초의 어린 잎으로 담근 그 김치 향처럼,
정말 잊지 못할, 가슴에 묻어두고 싶은 추억일거야.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하나가 아니겠느냐?.
아, 그런데......
내 디카에 잡힌 그 모습은 모두 어떻게 하지?
참신한 아이디어는 없고......
?????
!!!!!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
뭐냐구?
.
.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
'산따라 길따라 > * 智異十景'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 높은 곳을 향하여(5) (0) | 2005.08.07 |
---|---|
저 높은 곳을 향하여(6) (0) | 2005.08.07 |
저 높은 곳을 향하여(7) (0) | 2005.08.07 |
저 높은 곳을 향하여(8) (0) | 2005.08.07 |
저 높은 곳을 향하여(9) (0) | 2005.08.07 |